27. 기수
사람들은 마음속의 장소를 몇 개씩 갖고 산다. 그 장소는 잘 익은 감을 먹다가도, 노란 은행잎이 불현듯 가져다주기도 하고, 때로는 흩날리는 바람결에 생각나기도 한다. 찾아 가 보고 싶은 장소다. 언젠가 한 번은 가봐야지 하면서 흐르는 시간에 맞춰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찾는다. 그렇게 다시 간 그곳은 낯익으면서 낯설다. 넓혀진 도로, 정비된 가로수와 새로 생긴 다리, 도롯가 건물은 그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 문득 바라본, 고개를 들어 눈에 들어 오는 능선을 보며 그 옛날 그 장소임에 반가움과 추억이 떠오르는 경험을 한다.
어두컴컴한 국도를 달리다 먼 마을 깜박이는 불빛을 보면 40년 전 춘호네 집이 생각난다.
고창을 떠나기로 했지만 가야 할 곳이 없었다. 다행히 서울행을 택하지 않았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사장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한 것, 영업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읍내 터미널 의자에 앉아 오가는 사람과 떠나는 자동차를 바라보다 춘호가 일어섰다.
‘우리 집으로 가자.’
리더인 춘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춘호는 대단한 녀석이었다. 만약 각자 헤어지자고 했더라면, 기수 너 알아서 가라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춘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몇 번인가 버스를 갈아타고 낯선 터미널에서 서성이기를 반복하다 종점에 도착하면 또 다른 종점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허기 속에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터미널 주변을 서성이던 기억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행인의 뒤를 쫓다 되돌리기를 반복했다. 허기와 즐거움 없는 여행은 졸음만 몰고 왔다. 버스 속에서 내내 졸았던 기억밖에 없다. 창문에 머리를 찧으며 졸고 있는데 춘호가 어깨를 쳤다. 내려야 한단다. 버스는 산속으로 난 좁은 길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왜 산에서 내려?’
‘잔말 말고 빨리 내려.’
춘호가 거친 말로 뱉으며 재촉했다. 말투가 이상했다. 종점이 아닌데 내리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비포장 도롯가 느티나무 옆에 내렸다. 완벽한 산골이었다. 뾰족한 산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사이 작은 길로 버스가 사라졌다.
버스가 떠나고 정신이 돌아오고 눈에 들어온 풍경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산뿐이었다. (해가 빨리 사라지는 산골이어서 어둠이 빨리 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춘호 동네란다.
‘동네가 어딨는데?’
춘호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서 몇 개인가 실낱같은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저게 동네라고…?’
춘호 표정이 무서워 소리 내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고향을 찾은 춘호 얼굴에 반가운 표정이 없음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버스가 떠나고도 한참을 서성였다. 춘호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괜히 신작로 아래 둑으로 내려가 풀숲을 헤치기도 하고 계곡 얕은 물에 돌을 던져 물수제비 만들기를 하면서 집으로(차마 마을이라고 부르지 못하겠다) 서둘러 들어서려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한 친구네. 집에 왔으면 얼른 달려가야지 왜 머뭇거리는 거야?’
그렇게 어두운 도로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위는 더 이상 사물을 분간하지 못할 만큼 어두워졌다. 연기가 사라지고 깜박이는 불빛이 나타나자 그제야 마을을 향하여 걸음을 떼었다. 작은 몇 채의 집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침침한 불빛이 주변을 더 어둡게 만든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키보다 낮은 돌담이 있고 반은 쓰러져 닫히지 않는 사립문을 들어선 마당은 정말 작았다. 마당에 어울리게 낮은 지붕 아래 꼬마전구가 힘겹게 빛을 내는 마루에 몇 사람인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들어서는 그들을 잠깐 쳐다보다 다시 고개를 숙여 먹는 것을 계속했다. 누구 하나 말을 걸거나 일어서지 않았다. 낯설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어도 그렇지. 가족이 보인 뜻밖의 반응에 사고가 멈추면서 어둠이 익어 갔다. 노인 한 사람, 부부로 보이는 서른 중반과 열 살이 안 돼 보이는 아이 둘이 앉아 있다. 춘호는 익숙한 분위기인 듯 예상한 것인 듯 아무렇지 않아 했으나 기수와 대근이는 안절부절못하고 돌아서 나가지도 들어서지도 못하는 자세로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춘호도 무안했는지 누구도 앉으라고 하지 않는 마루 끝에 앉으며 친구들을 불렀다. 그제야 며느리인 듯한 사람이 일어섰다. 작고 단단하게 생겼다는 것밖에 기억에 없다. 며느리가 일어서는 데 노인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했고, 며느리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대꾸했다. 말대꾸가 아니었다. 쥐어박는 말이라고 하는 따박따박 쏘아붙이는 말이라고 하는 말투. 그런 말을 주고받은 것을 보며 춘호 형은 내내 아무 말 없이 밥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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