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기수
‘얻어 먹으면서 다니는 여행’을 무전여행이라 한다. 낭만이 살아 있던, 정이 있던(지금도 있다!) 시절엔 무전여행이 있었다.(지금도 있다)
두 번의 무전여행 경험이 있다. 한 번은 십 대 후반, 여행 경비 없이, 완벽히 낯선 고장을 절대 자발적이지 않은 무전여행을 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 볼 때 인생에서 무전여행을 했노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시간이 그 산길을 걸었던 때라고 말한다. 두 번째는 대학 졸업하고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골짝 나라라 불릴 정도로 골짜기가 많은 고향 곳곳을 자발적으로 다녔다. 자전거로 다녔다. 손오공도 탐낼 복숭아가 태안사 가는 마을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자고, 아침에 출발하여 다녔다. 저렴한 곳을 찾아 사 먹으며 다녔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무전여행은 아니었겠다. 하지만 무전여행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전여행이 주는, 무전여행만이 갖게 해 주는, 그 고장을 완벽(?)하게 알 수 있고, 토종 음식과 민심, 그리고 거기에 몰입해서 찾은 내가 있기에 두 번째도 무전여행이라 말한다.
화양계곡을 떠나 담배 마을에서 며칠 동안 몸은 고됐다. 그런 노동을 언제 해 봤을까 싶을 만큼, 지독한 육체노동을 했다. 하지만 숙식이 해결됐다.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된다면 무얼 못할까? 배고픔이 해결된 꿈같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 또 걸어야 한다.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가야 할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갈 곳이 있다면 기를 쓰고 갈 수 있는데. 가벼운 발걸음으로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데.
길이 보이는 대로 걸었다. 계곡과 산길을 따라 걷다 보니 속리산국립공원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갔다. 산길 연속이다. 이제는 어느 곳에서 밤을 만나도 겁이 나지 않았다. 하룻밤 재워주라는 청을 스스럼없이 했다. 감자도 캐고, 옥수수도 따 주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 대부분 정이 있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산길 끄트머리에 점촌이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철로를 따라 걸어가자 저 앞에 새까만 석탄을 가득 실은 기차가 보였다. 신기했다. 이렇게 기다란 기차는 처음이다. 석탄 차 하나하나를 세면서 걸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내를 통과했다. 작은 도로가 산을 돌아 사라졌다. 산자락 길로 접어들었다. 임도다. 거칠었다. 파인 바퀴 자국을 따라 흙이 드러나고, 가운데가 솟아 풀이 무성했다. 걸어도 걸어도 사람 하나 없다. 산 새 지저귀는 길을 말없이 걸었다. 언제부터 춘호가 말이 없다. 풀을 밟으며 춘호가 걷는 뒤를 대근이 따르고 바퀴 자국으로 다져진 두 어 걸음 뒤를 기수가 따랐다. 떠버리 춘호가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여행이 끝날 때가 되었음을 뜻한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