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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치 Aug 26. 2024

별일 없이 산다

사랑에 대한 단상 10화

20대 시절은 골방 다락방에 서식하며 해골을 데생하며 파우스트박사처럼 세상을 관통하는 원리를 꿰뚫고자 하는 열망이 들끓었다.

철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종교와 마법의 세계까지 넘나드는 에니어그 5w4 유형의 '무속적'인 특징이 흑화 되던 시기였다.

이런 히키코모리 같은 성격에다 인생사 팩폭을 날리는 통에 감성적인 4번 유형(예술가) 아버지와의 관계는 발을 삐끗거리듯 악화일로를 걸었다. 결국 영구퇴출을 당하듯 집에서 추방되었다.

시내 변두리 옥탑방을 안전가옥 삼아 나의 세계는 비밀에 부쳐졌다. 아 해방이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도 자주 불멍을 하듯 무의식에 침잠해 육체노동의 일머리는 나쁜 편이었다.

그러던 중에 9번 유형(중재자) 추정되는 또래 남자아이와 친하게 되었다. 그 아이는 어린 소녀들이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한 아름 들고 가게에 출몰할 정도로 핸섬한 아이였다. 그 외에 담백한 성정 때문인지 나의 경계태세도 누그러뜨릴 만큼 자상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연락처 종이를 내밀며 " 네가 정말 힘들고 외로울 때 날 불러줘. 언제든 달려갈게"라고 말했다.

나는 도파민의 호르몬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는 건어물적 드라이한 감성으로 으레 우정의 표현으로만 받아들였다.

딴 여자애들과 말을 섞지 않고 오직 나와만 장난도 치며 섬섬옥수로 챙겨주는 자상함에 날 선 털이 빗질로 누그러지듯 그르렁대며 편안함에 길들여졌다.


​그런데 은둔자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밤이면 젊음의 폭풍에 나부끼는 영혼들이 비바람을 피해 나의 옥탑방 상아탑으로 기어올라왔다. 난 긴 머리를 동아줄로 내려뜨린 라푼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점점 잦은 방문이 이어졌다.

화제는 온통 연애문제로써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관계가 너미워와 죽일래로 막장을 치달아 나는 으레 인간들의 사랑은 참으로 갈대처럼 바람에 취약한 존재임에 환멸의 '역시 그렇군'으로 끄덕 끄덕였다.

그들이 찾아오면 들어줄 뿐 마이동풍 청취기술로 감정쓰레기통은 아니었고, 조언을 부탁했을 때만 선승처럼 사자후 할(喝)로 그들을 흔들어 놓았다.


​그런 귀찮음 속에서도 그 아이에게는 그르릉대며 내 성정의 결을 거슬리며 반기게 되었다. 말한 적 없는데도 내 입맛에 맞는 먹이들을 한 아름 들고 와 섭생에 관심이 없는 나의 초췌한 손목까지 피와 살이 돌게 만들었다. 골든 트리버처럼 다정하고 믿음직했다. 그리고 나는 점점 그에게 길들여져 갔다.


​그러나 또래 여자애가 그를 짝사랑하는 통에 둘이 썩 어울림직해 이어주는 오지랖 자락을 휘날리고 말았다.

그는 당황해했지만 이내 둘은 어린 왕자와 여우처럼 시간을 들인 만큼 사이의 폭이 좁아들었다. 그래, 그 여자애는 나와는 달리 애교도 많고 사랑스레 여자여자함 그 잡채였으니까.


나는 사랑을 모른다. 하물며 나 자신의 감정조차 채 느끼지 못하고 거리두며 객관화시켜 버리는 분석충이다.

나는 이성 간의 사랑에는 시니컬함과 무관심의 나이테가 있을 뿐, 겉은 거리를 두고 자라나는 나무와 같았다.

서로의 가지를 부둥켜 껴안는 연리지의 생태계와는 무관한 존재였다.


개인사정으로 일주일 넘어 그 아이가 아르바이트 나오지 않았을 때에 뒤늦게 감정을 알아차렸다.

아 나는 이 아이를 그리워하고 있구나...

그리고 내 세계의 울타리에 금이 가고 감정에 색채가 번져가는 것에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비틀거렸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럴 일은 없으리라고 단정했다. 그런 이유는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한 남자에 대한 불신이 아니었다.

난 그냥 태생적으로 그렇게 생겨먹었다. 젠장맞을.


나는 급히 그와 멀어졌다. 마치 좀머씨가 사람을 피해 다니듯 곁을 벌려 놓아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안심이다.


그러나 후유증은 내 마음에 흉터로 남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안도와 괴로움이 교차되는 길에서 방향치로 헤매었다... 아우우우우





그러다가 불혹의 월담을 넘어 44세의 독야청승의 만리장성의 외곬의 벽을 쌓던 중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서로가 소개팅인 줄도 모르고 서로 무관심한 낯으로 주선자와 함께 앉은 그는 핸드폰에 눈을 박고 마치 혼자 세상에 있는 듯 안하무인격의 무표정으로 다른 세상에 몰두했다.

어색한 공기를 깨고 물었다.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은 하죠."

그는 삐딱한 시선을 물끄러미 하고서는

"왜요?."

정말 이런 허례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쏘아붙이듯 말했다. 정말 꼰대 같고 재수 없는 타입이었다. 내 안의 아드레날린을 꾹 눌러 그래도 사람이 만났으면 인사를 건네야 하지 않나는 말을 횡설수설 흐리며 말했다.

잠시 주춤 생각해 잠기더니 이름을 또박또박 밝혔다. 참, 비싼 이름 탓에 오히려 이름을 잘못 알아들어 버렸다. 정 씨를 몇 개월이 지나도록 전 씨로 알았으니 말이다.

밥만 먹고 헤어지고 나서는 나는 완전히 그 사람을 까맣게 잊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녘에 걸려온 전화로 약속을 잡고는 그는  딸깍 끊어버렸다. 뭐지? 잠시의 황당함 뒤에 이내 대수롭지 않은 듯 무심히 넘겼다.


다시 급발진한 듯한 두 번째 만남은 더욱 가관이었다.

이미 만취한 상태로 밀폐된 룸으로 가서 자신의 이별로 종지부를 찍은 동거녀와의 과거사와 흑역사인 재무상태를 말하며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래. 세상엔 많은 인간유형이 있지. 인간군상의 데이터에 한몫 정보는 될 거야. 뭔가 떠 보면서도 거리를 유지하는 걸로 봐선 안에 많은 활화산과 같은 충성과 성실의 횃불을 쥔 6번 유형(충성가)일까? 아님 자기만의 세상의 법이 곧 성문법이 되는 카리스마의 8번 유형(지도자)일까?

만나면서 에니어그램 유형 찾기에만 호기심과 분석의 칼을 벼루었다.

무뚝뚝한 사색가 5번 답게 얼굴의 표정주름 한 획도 없이 시종일관 무표정이 표피인 채로 상대를 마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술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지루한 얘기를 나누는 중에 주선자인 9번 유형인 ㅇㅇ씨가 온다는 것이었다.

유형에도 궁합이 있듯 5번과 9번은 똑같이 움츠림 유형으로서 타인에게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열린 사고를 가진 공통점이 있어 대체로 남녀불문하고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며 친밀함을 가지는 펀이며 서로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관계이기도 하다.

ㅇㅇ씨가 왔을 때 나는 로봇의 무표정 무장제된 줄 도 모르고 싱긋 웃었다.

그때 갑자기 그가 표정에 급브레이크를 끼이이익 요란히 찡그리며 유치한 분통을 터트렸다.

" 나한테는 뾰로통 무표정만 보이다 왜 지금은 이빨을 다 드러내며 웃는 거냐. 나는 지금 가겠다. 엄마 찌찌 만지러 갈 거요."

하... 엄마 찌찌를 만지러 가겠다는 저 유치하고 유아적인 발언이라니! 나는 귓볼이 발개지고 황당하고 어이상실에 아연실색했다.

첫 질투라 그는 신사적 외피 다 벗어던져 민낯의 태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세상에 저런 세련되지 못한 짐승본능적인 반응이라니. 아연실소하며 호기심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손타지 않은 동물을 길들이면 어떨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나는 인간보다 자연 동식물을 좋아하는 편다.


그는 술이 거나히 취하면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대용량으로 포장해 와 한 입씩 떠먹여 주는 등 마치 어미새가 새끼 입에 모이를 주듯 먹여주는 습관이 있다. 이제는 익숙해서 그가 건네는 모이를  삐죽삐죽 입을 잘도 벌려 쪼아먹는다.

낯가림이 심하고 애정표현에 인색한 5번으로선 장족의 발전이다. 내가 역으로 길들여진 겐가.


그와는 극내향인인 것 외엔 공통점이 없다.

동굴골방에서 그가 폰으로 게임하고 드라마 몰아보기를 유튭으로 시청하며 소파에 지박령이 되어 좌뒹굴 거리면 나는 독서와 법상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우뒹굴거린다.

바쁜 뒹굴거림에 우리는 죄책감이 없다.


그러다 내가 남자와 벌써 5년 넘게 만나고 있음에 기적을 느끼기까지 한다.

남자라는 생물과는 시절인연이 없으리라고 생각할 만큼 천성적으로 비구니 마인드였으니까~

나의 홀로 있으려는 고독력의 횡포에도 끝까지 곁을 지켜준 건 사랑의 발로인가? 오기였을까?

그의 친구들이 결혼 안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대답한다.

" 아직 그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나의 궁금증과 호기심은 끝이 없다. 그리고 단정과 억측은 뒤로 물려둔 채 관찰을 한다.

아마도 인류의 원형을 연구하듯 나는 이 남자를 한 발짝 거리두고 대할 것이다.


서로가 떨어져 있어도 빛나는 별과 별의 관계는 아름답기에 우주에 속해 있지 않은가....

그러한 틈은 여백이 되어 관계에 균형감을 준다.

세상엔 별의별 관계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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