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본 <더 글로리>의 한 장면. 실실 볼우물을 쪼개듯 웃으며 뱉는 현남의 대사가 가슴멍울을 우직하게 만들었다. " 난 매 맞고 살지만 명랑한 년이에요."
그렇다. 삶의 몽둥이에 쥐어 터질 때도 또는 삶의 종지부인 장례식장에서조차 우리네는 피식 웃음이 샌다.
왜 태어났는지 원인을 묻는 허무보다 태어난 김에 살아가는 과정에 유머를 잃지 않는 명랑한 성정이 좋다.
나는 극내향형이라 표정반경이 좁아 웃는 상이 아닌 무표정이 태반이지만, 널찍한 내면에서 아장아장 뜀박질하는 명랑함이 내재되어 있는 편이다.
그러므로 미쳤을 때도 낙담에 오래 허우적대지 않고 마음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마음공부랄 것이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일어나는 정직한 질문에 답을 정해놓지 않고 머리를 비우고 가슴을 열어 그 환기된 상태 속에서 나란 개성의 방해 없이 고스란히 수용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절오라버니이신 부처와 교회오빠인 예수를 어렸을 적부터 사랑했지만 한국의 절과 교회와의 접촉적인 인연은 없었다.
한 번 출가를 결심해 비구니사찰에 발을 내디뎠을 땐 그곳의 적막과 경직함으로 고요와 유연한 내음을 맡을 수 없어 세속의 골방 서식지로 돌아온 편린의 기억이 있을 뿐이다.
나는 종교인이 아니라 종교성을 지닌 인물로 도돌이로 도는 궁금증과 진리에의 탐구력이 나이테로 지닌 나무와 같았다.
십 대 때 만난 인간실존에 의문을 던진 콜린월슨의 「아웃사이더」란 책을 통해 나만이 그러한 의문을 가진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사뭇 고무되었고, 라즈니쉬가 강해한 수많은 영성의 씨앗을 뿌린 페이지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책벌레였다.
그렇다. 타인과의 관계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읽었던 영성책들은 알아서 다음 책을 짐짓 가르쳐주어 영성인들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선 난 행운아다.
요즘은 내면아이 안아주기가 영성계에서 필수과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난 내면의 약하디 약한 아이를 눈높이로 이해해 주어 모성적 사랑으로 끌어안아주기란 심리치료 과정에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물론 고통과 트라우마에는 효과가 있음을 알지만 좀 더 본질적인 데를 비껴나간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새끼쥐의 꼬리를 잡고 쥐불놀이 하듯 빙글빙글 동네를 뛰어다니며 논 적이 많았다. (아 잠깐, 쥐야 그때는 내가 넘 어려서 미안해.)
한참을 정신없이 뛰다가 문득 나 자신을 인식하는 나란 비존재를 인지하게 되었고, 그럼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다. 분명히 나는 아까까지만 해도 짓궂은 5살 배기였는데 그 5살 배기 안에서 그 모든 상황을 고요히 지켜보는 내면 존재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나이도 없고 성별도 없고 그저 분별없이 바라보는 그 자는 누구이지?
모양은 어린애지만 그 내면의 주시자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완벽한 존재였다.
내 안에 늘 투명히 바라보는 주시자가 있어, 이 본다는 것은 모든 행위에 바탕이 되므로 항상 그 존재를 알아차리려 한다.
호접몽 편에서 꿈에서 깬 장주는 나비가 장주의 정신을 지닌 꿈인지, 장주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난 꿈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문제는 형태가 나비이든 장주이든지 상관없이 그 꿈속에서 모양과 상관없이 일관되게 주시하는 자는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물아일체란 개념과 호접몽이 시사하는 의미는 다른 것이다.
나의 경우는 불우한 유년을 보낸 듯했지만 상처받지는 않았다. 항상은 아니지만 그 주시자를 자각할 때면 분별이 없어져 불행과 슬픔이라는 재해석을 아교 칠하지 않아 가벼운 명랑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면은 약한 아이로 축소될 수 없는 완벽한 존재이지 않을까
부처님도 말씀하셨지. 모든 존재는 부처라고. 자신이 부처인 것을 까먹은 채 살기에 다시 그것을 기억해 내면 될 뿐임을 설법하셨다.
나는 명상도 안 하고 기도는커녕 절수련도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쭈그려 앉아 가만히 있는데, 남들이 볼 땐 딱 멍 때리는 꽃단 광년이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씨앗이고 주시자는 꽃이 된다.
온 데가 꽃천지다.
영성이 별 거 있나요. 지금 이 순간 내 안의 꽃이 피어나도록 힘을 빼고 즐겁게 기다립니다.
어느 순간 바람결이 속삭여주듯 내면의 교사가 이끌어 줍니다. 그와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그래서 아직은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행복한 꿈길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거리가 없는 여정을 걸어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