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는 나를 조의하는 의미를 붙여 검정모자를 쓴 채 책페이지에서 활자를 갉아먹는 책벌레로 서식하였다.
문 틈으로 새어 보이는 모습을 흘깃 본 이들은 책은 시야에 가려져 마치 하루종일 눈동자를 허공에 걸쳐 면벽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단단히 미친 여자라는 쑥덕공론으로 혓바닥에 생기가 돌았다.
약이 잘 들었는지 환청과 환시는 사라져 평소의 침착함으로 돌아왔고, 눈을 감으면 알록달록한 빛이 사이키조명으로 휘황찬란해 잠을 들 수 없었는데 이제는 독한 수면약만 복용하면 5분 이내로 쓰러졌다.
규칙적인 섭생 및 약복용과 옥상에서 광합성을 한 덕분인지 뼈와 핏줄만 앙상하던 손에도 제법 살이 올라왔다. 헨델과 그레텔의 마귀할멈이 흡족할 만큼이었다.
약을 잘 꼬박꼬박 복용해도 간호사들은 불시에 혓바닥 아랫쪽까지 검침하였다. 그럴 법 한 것이 환자들은 약을 불신하고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네들은 마치 병에 관한 한 전문가인양 나에게 성분과 작용에 일장연설을 하며 이 약은 굳이 먹을 필요 없다며 설득까지 하였다.
호기심 침샘 자극하는 분야 외엔 일상에 촌무지렁이인 나로서는 그들의 지식에 관심도 자극도 못느꼈지만 무표정을유지한 채 끄덕여주었다.
여기서는 이름대신 알콜과 멘탈(정신병)로 서로를 구분하며 지칭했다. 두 사람만 있어도 소사회를 이룬다고 할까. 나름 엄정한 기준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며 계급을 짓는 건 일반사회와 비슷했다.
정신병원엔 예상외로 알콜중독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 병동에 조현병 환자는 나 포함 두 명 뿐이었다.
한 명은 북남침을 우려해 매일 운동으로 단련하는 꽤나 과묵한 청년이었는데, 말을 걸으면 점잖고 또랑한 상태였다. 알콜들이 조롱 반 격려 반으로 하이파이브를 청하는 족족 받아주는 착한 심성까지 지녔다.
조현병을 가진 사람이 사건을 저질러 미디어메인을 장식할 때 마다 사회는 두려움에 치를 떤다.
물론 내면의 강요에 꼭두각시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꼭두각시가 되어 놀아나도 그 내면의 명령은 누가 내린 것인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내면의 축적된 무의식에 상처의 생채기가 더해져 망상이라는 형태로 투사되는 것이다.
그만큼 조현병의 병의 증세는 일관적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된다.
어떤 이는 현인들의 인생사 연륜의 말씀이 들려 이게 조현병인지, 내면의 지혜로운 말씀의 계시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나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아 초반에는 우주의 섭리와 인간의 삶의 방향성과 내면의 부조리는 어떤 기제로 작동하는가에 대한 목소리만 들었다. 나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정체성을 깨부수는 작업이 있기까지 했다.
선악과라는 상징을 통해 분별의식과 지각의 오류와 더불어 신으로부터의 분리를 선택했다는 죄책감까지, 인류가 공통으로 느끼는 원죄에 대해 몸을 숨기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원죄와 원초적인 두려움이 뒤범벅으로 정신줄을 팽팽히 놓지 않으면서도 광분상태가 되어 강제입원하게 된 것이다.
무의식의 먼지폭풍이 일어난 것에 대한 잇점도 있다. 한꺼번에 내면에서 일어난 폭풍의 눈에서 눈도 꿈쩍 안하고 직시하는 바라보는 자를 인식한 것이었다. 보여지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모든 현상의 길로에서 묵묵히 보는 자.
그를 기억해낼 때 마다 폭풍은 그저 지나가는 구름이었다.
내가 보는 현상은 내면이 투사된 그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보는 것에 대해 책임을 느꼈다.
두려움, 사랑 두 가지를 선택할 수 자유가 나에겐 있었다.
병원옥상은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담배와 커피를 줄줄이 하며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사랑의 추파에 마음을 퐁당 빠지는 커플이 있었다.
나는 늘상 구석진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며 생각에 골몰하였다. 친구도 필요치 않았고 태생적으로 외로움이란 싹수가 없는 편에 속하는 극내향인이었다. 처음엔 많은 사람들 무리에 섞여 당황은 했지만, 뭐 어찌랴 어차피 혼자란 사실에 수긍했다. 세상은 내가 눈 감으면 사라지는 것이고 눈을 떠도 나의 세상이 펼쳐질 뿐인 것을.
그런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음료수와 커피와 빵 등등을 주었다. 나는 단순히 환우로서의 친절인 줄로만 알았다. 근데 아차 여기도 사회라는 것을 깜빡했다.
다양한 먹거리를 받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남자들인 것이다. 그네들에겐 그런 호의를 제공한다는 것은 마치 명품가방을 선물하는 것과 같아 그런 걸 흔쾌히 받으면 마음을 수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난 앞서도 말했듯이 관심분야 외에는 거의 촌무지렁이이다.
여자들의 질투어린 질타에 정신이 번쩍 들어 일절 받지 않고 시니컬한 태도를 견지했다. 아예 앞에 사람이 있어도 투명인간 취급하듯 싸늘히 곁을 지나갔다.
덕분에 다시 내면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외부도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되찾았다.
옥상에서는 다양한 커플이 우후죽순처럼 결실을 맺었다.
가장 예후가 안 좋은 것은 알콜끼리의 결합이다.
그들이 밀월휴가를 지내고 온 날은 십중팔구 여자들의 얼굴에 멍꽃이 흐드러지게 번졌다.
상대남자는 평소에 친절하고 다정하고 관상까지 착한사람 자체였는데,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리라.
왜 사랑하면서 자신의 비루한 것을 내놓고 상대의 영혼까지 갉아먹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이해 자체를 할 가치가 없었다.
인간은 어차피 상대를 바꿀 수 없으니까. 오로지 나 자신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에 이견이 없다.
미래가 불명료하고 정신까지 혼미한 그들의 애정이었지만 그 순간 만큼은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그러나 덧씌운 환상은 벗겨지고 현실은 너미워와 죽일래였다.
원체 인간계에 관심이 없는 탓에 관찰하는 흥미로움도 사그라들었다. 그만큼 관계의 메커니즘의 통속적 원리에 식상한 나는 극소수의 사람만 교류를 나눴다.
그런 중에도 병원에서 강제퇴원한 커플이 쇼파에 쭈그려 자고 있을 땐 내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기도 했다. 착한 행동이 아니라 자동반사적으로 나온 행위라 금세 잊었다.
그들은 이런 친절을 받아보지 못해선지 나를 찾아내 천사라 부르며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이후 6개월의 병원생활이 별일없이 훌쩍지나가고 근로능력평가서는 물론이고 면담과 퇴원 이후 조사까지 통과한 끝에 나는 사회 취약계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