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비껴갈 수 없으나 함께 삶으로 살아내는 법
타로에서 가장 꺼리거나 피하고 싶어 하는 죽음카드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알면서도 마치 제 인생에 죽음이란 없는 듯 삶에 아등바등 주력하느라 무의식에 처박아 두지요.
수비학적으로 13은 4(1+3)로 황제 카드와 대응됩니다. 황제는 정복전쟁과 질서와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죽음을 통하여 막강한 힘은 지닌 인물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의미와 연결 지을 수도 있지요
또한 4라는 물질과 대지의 의미로 죽어서 갈 곳은 다시 땅이라는 것과 또 땅의 생명력은 거름(죽음)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간혹 죽음을 예견하는 사신의 카드로도 등장합니다만....)
죽음과 재탄생의 순환구조여서 죽음이 곧 종말을 뜻한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이 카드를 보면 되어요.
검은 갑옷을 입은 해골의 기사가 백마를 타고 검은 바탕에 백장미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이는 흑백의 대비로 죽음을 더욱 강조하는 한 편 흰 장미는 죽음을 통과하듯 씨앗의 죽음을 통해 피어난 부활을 뜻합니다.
백마의 발굽 아래로는 벗겨진 왕관 주인인 왕이 쓰러져 있어요. 4번 카드인 황제처럼 아무리 막대한 권력을 지녔어도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었네요.
처녀는 기진맥진 혼절직전인 상태고 그에 비해 어린아이는 죽음을 아직 모르듯 순진한 얼굴로 꽃다발을 들고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어요.
아직 삶과 죽음이라는 변화에 대한 공포의 인식이 주입되지 않은 아이는 유연하고 천진할 따름이에요.
오직 교황만이 두려움 없이 '신의 뜻대로'의 심정으로 경건히 두 손 모아 맞아들이고 있어요.
이는 낡은 자아를 버리고 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죽음이 곧 부활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음으로 두려움 없는 내면을 지녔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20대 가장 찬란했던 시절 죽음은 늘 가까이서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하듯 마음에 드나들었어요.
그때 잉마르 베르히만이라는 감독의 제7의 봉인이라는 영화를 좋아해서 즐겨 감상했어요
<제7의 봉인>은 요한 묵시록 8장 1절을 인용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해요.
"하느님의 어린양이 일곱 번째 봉인을 열자, 하늘이 반 시 정도 고요하더니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이때 하늘의 고요함은 신이 사라지고 죽음이 드리운 암흑을 뜻해요
오랜 십자군전쟁에서 돌아와 회의와 번아웃으로 쓰러진 안토니우스에게 죽음이 찾아옵니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목숨을 담보로 죽음과 체스
경기를 시작하며 죽음은 체스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림자처럼 그의 여정에 동반합니다.
안토니우스가 죽음의 사자와 체스를 두며 시간을 번 것은 살고자 하는 비루함이 아니요, 신의 존재와 의미 또는 삶에서 신의 임재를 느끼려는 발로였어요.
전쟁을 통해 약탈과 살인, 종교라는 명목으로 칼을 들며 협박하는 잔혹함을 체험한 그는 죽음이 앗아가기 전에 알고 싶었어요
예루살렘을 이슬람 국가에서 탈환하자는 성스러
운 명분을 갖고 시작된 종교 전쟁이었으나
십자군 전쟁은 신의 뜻을 빌미로 인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야만의 전쟁이었어요. 그리스도교를 믿는 서구권이 교황권을 확장하
고 새로운 영토를 지배하려는 탐욕일 뿐이었죠 신의 뜻을 앞세웠지만 그곳에 신은 부재했기에 안토니우스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당시에 창궐했던 페스트로 인해 이를 신의 처벌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채찍으로 자신을 때리는 고행을 일삼는 자들이 있었지만 실상은 미리 채찍으로 면죄권을 스스로 부여해 내면 깊숙이에 끊어놓은 천국행 티켓을 놓지 않으려는 탐욕이 있었어요.
한 편으로는 이왕 죽을 바엔 쾌락에 심신을 맡기자는 진흙 속에 나뒹구는 돼지파가 있을 뿐이였죠
이 죽음의 춤씬은 꽤 인상에 각인됩니다.
이 엔딩의 메시지는 죽음 앞에서 특권이란 있을 수없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안토니우스와 여행을 떠난 마을의 평범한 시민, 주인을 섬기는 기사까지 다양한 개인들이지만 이들 앞에 등장한 죽음은 모두의 손을 잡고 하나의 대열을 이루게 합니다.
그들은 다른 특징을 가진 개인이라기보다 죽음의
춤을 완성하기 위한 단 하나의 존재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비껴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봄을 노래하며 내일을 기대하던 광대 부부였어요.
그들은 페스트에 걸려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낙관적인 자세와 남에게 나눌 줄 아는 넉넉한 품성을 놓치지 않았어요.
광대 남편은 성모 마리아의 현현을 본 것처럼 안토니우스가 죽음과 체스를 두는 장면을 목격한 뒤로 아내와 아들을 이끌고 안토니우스 무리에서 이탈해 죽음으로부터 달아나죠.
이 영화는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묵시록을 인용하면서 시작되나 부부가 어린 자식과 함께 먼 수평선으로 걸어가는 엔딩 솟을 통해 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희망을 슬몃 드러냅니다.
마리아를 볼 수 있는 있는 영안을 지닌 광대남편은 죽음 또한 정확히 목격할 수 있었으며 죽음을 인지하는 일은 죽음 앞에 사라질 사소한 일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삶으로 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피폐로 마른 안토니우스에게 산딸기와 우유를 건네듯 자신이 가진 소소한 것일지라도 모든 사람들과 나눌 줄 알았어요.
모든 인간의 삶이 죽음 앞에서 근본적으로 무력해지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와 적을 가르는 다름과 차이도 무색해지고 사실은 나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걸 알고 마음의 칼을 내려놓게 되지요.
그럴 때 내가 적으로 알았던 마음이 서로를 진정 모르는 상태가 되어 서로 몰랐던 삶에 서로를 초대하여 손을 잡고 환희의 춤을 출 수 있을 것입니다.
13번 죽음 카드는 두 탑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의 새날을 의미하듯 새로운 생명이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작을 하려면 먼저 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놓을 때야 비로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법이지요.
내 삶에 끝내야 할 , 종결시켜야 할 일이 있음을 말해주니 무엇이 끝인지 잘 살펴봐야 해요.
내가 꽉 잡고 놓지 않던 소중하게 여기는 게 끝인지, 아니면 내가 벗어나야 할 고통이 끝인지, 변화에 두려워 말고 직시해야 한답니다
만약 짝사랑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던 상황이 종결을 맞았다면 두 사람이 무지개로 연결되는 것이니 얼마나 기쁜 일이 되나요?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고통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해요.
그러니 죽음카드가 나올 때는 막연히 두려워말고 무엇이 종결될지, 종결하려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그리고 그 후에 무엇이 시작될지 곰곰 생각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타로카드는 무조건 부정이나 긍정의 흑백논리로 풀어지지 않아요. 삶의 양면성 다양성에 열어두어 자신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지요
자, 이제 죽음 카드에 대한 선입견과 두려움을 내려놓으셨길 바랍니다.
덧붙이지면 죽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과정이며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낙엽으로 죽어 다시 새싹으로 살아나듯, 생명이 죽음을 껴안고 죽음이 생명을 순환하는 영원일 것입니다.
https://youtube.com/shorts/hUGHozOaExU?si=eqwWoGwLrqqU5LJu
덧>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하루 당겨 글을 발행했습니다. 죽음을 앞당긴 셈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