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감상
「스물여섯 살 난 남편은 어제 태어났던 아기를 묻으러 삽을 들고 뒷산으로 갔다··· 한순간 처음으로 여자의 가슴이 화해진다. 여자가 몸을 일으켜 앉아 서툴게 젖을 짜본다. 처음에는 묽고 노르스름한 젖이, 그다음부터 하얀 젖이 흘러나온다.」 _<젖> 중에서
#흰
#한강소설
#문학동네
<강보>에서 ‘믿을 수 없는 고통을 방금까지 겪은 사람’인 작가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는 순간, 작가는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침을 이렇게 표현한다.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채, 아직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서도 여전히 둘은 알 수 없는 무엇으로 연결된 듯, 세상을 잃은 것처럼 울어 대던 아기는 엄마의 품에 안기자 울음을 그친다. 아름다운 장면이 주는 울컥함은 뒤에 이어지는 <배내옷>에서 극단적으로 바뀌어 비극의 먹먹함이 된다. 작가의 아이는 살아서 작가와 연결되어 있지만, 과거 작가의 어머니와 언니는 끊어졌다. 태어나 눈을 맞춘 지 2시간 만에.
소름끼치게 슬픈 이 장면보다 어째서인지 나는 <젖>의 저 문장(첫 줄)에서 더 많이 아팠다. 처음 세상에 나온 아기에게 꼭 필요한 영양소와 면역 물질을 가득 품고 있어 귀하다는 초유, 노란 젖. <젖> 속에 그 젖을 먹일 아기가 없다는 표현이 없지만, 그래서 더 비통하다. 대놓고 슬픔을 쏟아내는 문장은 처절하지만, 간혹 슬픔을 강요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반대로 한강 작가의 글처럼 감정을 절제하고 사실만 나열하는 듯한 문장은 오히려 미칠 것 같은 고통을 독자도 같이 감당하게 한다.
얼굴 핏줄이 다 터지도록 힘겹게 낳은 첫째에게 처음 젖을 물리던 그 흰 기억을 나는 잊을 수 없다. ‘흰 기억’이라 말한 이유는 정말 영화에서 아련한 옛일을 떠올릴 때 사용하는 뿌연 화면 효과처럼, 그 기억은 희고 뿌옇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은 입이 가슴에 닿던 여린 감촉, 간지럽기도 찌릿하기도 한 그 생경한 느낌은 오히려 선명하다. 나는 그 경이로움과 벅찬 감정의 크기로 젖이 불어 화한 가슴의 젖을 손으로 짜내어 버려야 했던 그 어머니의 고통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대상으로 인해 느끼는 기쁨과 그 대상의 상실로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같을까?
한강 작가의 어머니는 홀로 산통 끝에 낳은 아기, 한강 작가의 언니를 2시간 만에 떠나보냈다.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을 뇌까리며. 흰 것에 대해서 쓰겠다고 결심하고 목록을 만들었지만, 흰 것에 대해 진짜 쓰게 된 것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가서였다. 독일 나치의 폭격으로 95% 이상의 건물들이 파괴된 도시의 모습을 박물관 영상으로 본 후, 작가가 머물고 있는 그 곳이 ‘흰’ 도시라는 것을 안 그 날, ‘도시의 운명을 닮은, 파괴되었으나 끈질기게 재건된 사람을, 그이가 내 언니라는 것을’ 안 그날부터였다.
「내 삶과 몸을 빌려줌으로써만 그녀를 되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 책을 쓰기 시작하고 있었다.」 _작가의 말 중에서
한강 작가는 어째서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투성이의 삶을 살아왔는지 그 시작은 어디였을지 늘 궁금했다. 『흰』을 읽고 나니 ‘어쩌면 언니의 죽음이 그 시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친다.
제목처럼 희뿌옇고 안개가 낀 것처럼 명확하지 않았는데, 300독서 모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해설을 보고서야 ‘흰’의 의미를 조금 알게 됐다. 한강 작가는 흰 것이 삶의 더럽혀진 부분을 소독해줄 것, 상처를 치유해줄 것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한 듯하지만, ‘어둠과 상처와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숨는 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다(해설)’는 결론에 다다른다. 한강 작가의 모든 글에 바탕인 그 사실이다.
‘흰’은 하얗고 순수한 하양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는 하양이 아니라 ‘흰’을 쓰고 싶었다고. 흰 ‘강보’는 생명을 감쌌지만, 흰 ‘배내옷’은 수의가 됐다. 작가의 흰 젖은 생명을 잇는 영양분이 되었지만, 엄마의 흰 젖은 버려져야 했다. ‘초’의 흰 심지는 불꽃을 일으키며 자신의 몸을 서서히 밀어 넣으며 사라진다. ‘흰’은 그런 것이다. 상반된 생명과 죽음의 의미를 모두 가진 것. 고통과 기쁨을 모두 대변할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