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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상어연필

막둥이의 보물

by 하다

고래상어연필.


아이들이 잠들고 조용한 밤,

책을 읽다가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을 발견한다.

시선이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을 겨우 떠나 연필꽂이로 이동한다.

하필 가장 뽑아 쓰기 좋은 위치에 고래 연필이 날 유혹한다.



보홀섬에서 딱 하나 사 온 고래 연필은 막내의 보물이다.

막내는 자꾸 닳아 짤막해지는 고래 연필을 아까워하면서도

글쓰기 숙제를 할 때면 의식을 치르듯

꼭 고래 연필을 찾아 뾰족하게 깎기부터 한다.

그 모습이 예쁘다 생각했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나도 고래 연필을 한번 써보고 싶은 거다.

조심스럽게 고래 연필을 집어 들곤 아까 눈을 떼기 아쉬웠던 문장 아래에 줄을 그어 본다.

고래 연필은 “사아아아악!” 유난히 명랑하고 단호한 듯한 소리를 내면서 자기 임무를 수행한다.

청명하기까지 한 서걱? 사각? 소리가 어찌나 예쁜지.

거기다 십 년 정도 써서 손에 익은 식칼처럼 손가락에 착 감기는 그립감은 또 무슨 일인지.

조금 더 써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는데 나는 5초를 더 사용해야 했다.



고래 연필은 어릴 적 흔히 쓰던 ‘지우개 달린 연필’로 치면 지우개가 달렸을 자리에 보홀에서 볼 수 있는 고래상어모형이 달려 있다. 정확히는 ‘고래상어 연필’인 셈이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아래쪽은 하얀색이고 등 부분은 투명하다.

투명한 등 안쪽에 모래와 푸른 불가사리가 장식되어 있어

마치 바닷속을 보는 듯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고래상어모형이 붙어 있는 연필이다.



하얀 연필엔 “BOHOL”이란 영어가 대충 쓴 것 같지만, 멋스러운 필체로 장식되어 있다.

“BOHOL”은 이제 적당히 진하고 적당히 단단한 연필심으로부터 7.3cm까지 가까워졌다.

앞으로 “BOHOL”에서 “BOHO”, 또 “BOH”, 그다음엔 “BO”만 남겨지겠지.

그 지경이 되면 더는 연필깎이에 들어갈 수 없어질 텐데,

그러면 고래상어 연필은 무사할까?

막내에게 고래상어 연필이 까맣게 잊히면,

그땐 ‘내가 고래상어를 자주 열지 않는 내 필통에 넣어주어야지’하고 싱거운 생각을 한다.




곧이어 이런 생각도 한다.

‘그래, 하나만 사 오길 잘했어. 여러 개 사 왔다면 막내가 연필을 이렇게 귀히 여기지 않고 아무렇게나 쓰고 친구들한테 플렉스나 했을 거야.’

개인적으로 내 아이들이라도 다 쓰면 또 사면되고,

망가지면 다시 사면되고,

잃어버림 또 사면된다는 물질만능주의적 소비에 물들지 않길 바란다.



한국 돈으로 1500원 정도 하는 연필 하나를 저토록 애지중지하는 경험을 또 어디서 하겠는가 말이다. 볼수록 예뻐 더 사 오지 않은 걸 아쉬워했는데 이제 와보니 오히려 좋은 교육 기회가 된 옳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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