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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다 Jun 05. 2023

나태지옥에 가면 할 말은 있어요

이유 있는 무기력


57분 n초, 집으로 가는 막차는 22시 58분 기차였다.

전철에서 내린 건 57분 몇 초인지 모를 시간이었는데 늘 숨 막히는 긴장감에 뛰어내려 계단을 2개씩 올랐다.

바로 옆 플랫폼이지만 건너가야 하기에 있는 힘껏 달렸고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세이브했었다.


뉴스는 정확히 20시에 시작하지 않았다. 나는 늘 57분 무렵부터 업무가 시작되었으니 19시 땡분 뉴스였다. 1초라도 마우스에서 손을 늦게 떼는 순간 맞물렸다. 그날은 약간의 야근 속 야근이 진행되었다.


5분 단위의 게시글에서 트래픽을 위해 3분 단위로 좁힌 적이 있었다. 예약발송도 해보고 실시간으로 시간텀을 조절하며 매시간 매분을 아낌없이 털어낸 적이 있다.


한 직장생활 8년 동안 내가 수도 없이 해온 행동들을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1분 1초 긴장을 늦출 수 없는지라 퇴근 후에는 남은 시간이 아까워 왜 하루는 24시간이냐 투덜거린 적이 있다. 바빴지만 그 안에서도 하고 싶은 게 많았고 어떻게든 틈새시간에 끼워 넣으려 몸부림쳤었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


결혼을 하며 직장생활과 안녕을 고했고 공부를 했다. 틀에 박힌 시간 안에서 내 시간을 만들려 발버둥 치던 나에게 온전한 시간이 주어지며 내가 마음껏 컨트롤해도 되었고 이는 출산을 경험하며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아기를 탓하고 싶지 않다. 내가, 우리가 걷고자 한 길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둘째는 갖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힘들다고 투덜거리고 싶다. 근데 이마저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던 찰나 이사를 했다. 언 2주가 되어가는 지금도 정리를 필요로 하는 이삿짐이 널브러져 있지만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조건들 속에서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제일 먼저 찾기 시작했다. 나태해졌고 무기력해진 나의 일상에 한 숨을 불어넣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전 집에서는 느껴볼 수 없었던 바람이 세차게 불어 들어왔다. 나에게 숨이 필요하다는 걸 너도 눈치챈 거니?라고 묻고 싶을 만큼 정말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기 시작했고,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사랑하는 아기가 좋아하는 책들을 정리해 뒀다. 너도 엄마가 느낀 그 바람을 느껴봤으면 싶어서.


뜨는 해보다 지는 해를 더 좋아하는 나에게 노을맛집이기도 한 이 집은 계속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느낄 수 있게 해 주며 나를 다독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앉아있다가 내가 지금 당장 죽는다면 ’나태지옥행이겠구나 그것도 무엇보다 빠른 길로‘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육아에 지쳤고 그래서 지금 아무 생각이 없어요,라는 말은 나태지옥 왕에게 변명으로 들리겠지 싶었다. 삶을 낭비하는 자를 처벌하라!


(재미 삼아 찾아본 건데, ENFP인 나는 저 지옥마저도 즐길 기세지만 ENFJ로 살짝 기울어진 지금 나 자신보다는 타인이 우선이겠구나 싶다. 지금의 나처럼?)


벌떡 일어나 가장 마음 쓰이는, 아기 물건이 가장 많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PP박스가 제자리를 못 찾고 있지만 신랑에게 SOS 했던 일부터 내 스스로 해결해 보았다. 에이 뭐야 별 거 아니네. 나도 할 수 있는 거였네를 시작으로 묵혀뒀던 것들을 통째로 버리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내 지친 마음도 같이 털어내기 시작했다.


게으름과 무기력 그 사이 어느 곳, 삶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아요. 나를 되찾는 과정이 조금 힘들고 시간이 다소 걸리고 있는 것일 뿐.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엄마이기보다 나는 나라고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날을 그리면서 오늘 해가 뜨면 또 문을 활짝 열고 바람 한 숨 들이켜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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