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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다 Jun 20. 2023

부장님이 쏘아 올린 내 이름 석자

시대를 못 따라간 내 이름


개명 10주년, 조만간 친정에 가서 동생과 축하파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우리 두 자매의 이름이 30년 만에 어여쁘게 맞춰졌으니!




내가 태어나고 작은할아버지는 이름 두 개를 가져오셨다고 한다. 직접 작명하신 이름으로, 효자였던 우리 아빠는 그 이름들을 거절할 수가 없었고 가족투표를 통해 만장일치로 나는 효순이가 되었다. 다른 하나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호순이라 공개하겠다. 이날 우리 엄마의 가슴에는 못이 박혔다고 한다. 한이 서린 큰 딸의 이름이라니.


한빛, 샛별, 다혜, 나래, 아름이와 다운이 등 친구들 이름에 비춰 볼 때 내 이름은 여지없이 촌스러웠다. 학창 시절에도 나는 왜 이름이 촌스러울까에 대한 의문에 그저 작은할아버지께 예의를 갖추고자 했던 아빠의 효심이라는 답 밖에 찾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는 아쉬움으로 남기고 마음을 달랬다면 머리가 클수록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늘 돌아오는 답은 "할머니가 되어서 한빛 할머니~ 샛별 할머니~ 하면 이상하지 않을까? 별로잖아"라는, 지금 생각해 보면 이거 가스라이팅이지 않나 싶을 정도로 나이 든, 노년의 나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할머니가 되어서 불리는 이름보다 지금 젊었을 때, 내가 가장 활발히 활동할 때 내 이름이 가장 많이 불리는데 어째서 할머니 이름에 어울린다는 이유로 지금 이름을 유지해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때 당시만 해도 개명은 굉장히 낯선 일이었다. 그리고 본명보다 별명, 애칭으로 더 많이 불렸기 때문에 내 이름을 듣는 횟수가 적었다.


내가 개명하기로 아주 굳. 세. 게. 마음을 먹은 건 바로 첫 취업 후 신입사원 환영의 의미를 담은 첫 회식자리에서 나에게 벌어진 일이었다. 긴장감과 어색함을 온몸에 휘감은 채 멀뚱멀뚱 앉아있던 나에게 우리 부장님께서 물어오셨다.


"효순 씨, 근데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어?"

"아, 저희 작은할아버지께서 지어주셨습니다"

"아, 근데 태어난 해에 비해 너무 올드하지 않아?"

"아, O_O!!!!!!!!!!!"


(사실 그 옆에서 자넷잭슨을 닮았다고 한마디 더 얹어주시는 차장님의 말씀이 더 충격적이었다. 자넷잭슨이요? 이름이 이렇게나 구수한 자넷잭슨이라니.)


부장님은 우리 부모님 세대시고, 부장님의 자녀분들은 내 또래였기 때문에 의문을 가지실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이 불편했다기보다 나는 내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에서 이 에피소드를 우리 엄마께 바로 말씀드렸다.


"엄마, 난 해야겠어"

"응 네 마음대로 해도 좋아"


첫 월급을 받고 엄마를 모시고 무작정 작명소를 찾아갔다. 새로운 이름을 받는 자리에 엄마와 함께 한다면 엄마의 가슴에 박힌 못도 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생년월일만으로 사주팔자가 줄줄이 읊어졌고 5개의 이름을 후보군에 올려주셨다. 이 중에 2개만 가지고 가라는 말씀에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2개만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도 원하는 느낌의 이름과 나에게 어울릴 법한 이름을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는 나에게 엄마가 한마디 건네주셨다.


"우리 가족 말고 제 3자인 사람들한테 한 번 물어봐, 그 사람들이 부르기 쉽고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이름이 너한테 맞는 이름일 거야"


그다음 날 회사에 이름 2개를 소중히 품어서 갔다. 그리고 곧장 직장 동료 및 상사분들께 이름 후보군을 공개하고 SOS를 했다. 여기서 두 번째 만장일치가 나왔다. 내 첫 이름을 지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속에서의 만장일치였다.


우리 아빠는 모르게, 비밀리에 개명이 진행되었고 때를 봐서 아빠께 말씀드렸다. "그려"라는 대답 말고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얼마 뒤 아빠의 지인분도 함께 하는 식사자리에서 내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한참 듣고 계시던 지인분께서 아빠께 "사장님이 잘못했네. 어떻게 딸 이름을 그렇게 지어, 아무리 예라고 해도 어찌 그렇게 지었는가. 이름 참 잘 바꿨네" 아빠는 굉장히 멋쩍게 웃으셨는데 미안함이 살짝 엿보였다.

(이후 몇 년 전 아빠도 개명을 하셨다. 60 평생 쓰던 이름을 단번에 바꾸기에 부담스러워하셔서 한자만 바꾼 건 안 비밀이다)


이름을 바꾸고 난 뒤 나는 제2의 삶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새로운 이름에 걸맞은 이미지로 나를 탈바꿈하고 싶었고 이전의 내 모습은 모두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나라는 사람은 없앨 수 없지만 변화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실제로 나는 이전 이름의 삶보다 훨씬 자신감 있고 활기 넘치는 사람으로 많이 변했음을 내 스스로가 지금도 느끼고 있다.


얼마 전 내 동생도 내 이름을 따라 개명을 했다. 딸들이 모두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니 우리 부모님 마음이 참 씁쓸하셨겠다 싶지만 내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내 동생도 고민을 거듭한 끝에 스스로 작명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30여 년 만에 드디어 자매의 이름이 맞춰졌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아빠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못하셨다. 아빠의 입장도 있으셨겠지만 내가 그간 커오면서 겪은 고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또 모두 공감해 주실 수는 없으리.


10년, 새로운 이름으로 산 세월이 아직 이전 이름으로 산 세월을 따라잡지는 못했지만 나의 과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린다, 이전 이름은 이제 어색하다고 말할 정도로 내 이름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나는 이름이 어찌나 좋던지 신랑과 연애할 때도 애칭은 만들지 않았다.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고 지금까지도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작년 아기를 낳고 이름을 지을 때도 양가 부모님의 배려로 엄마와 아빠가 직접 지을 수 있게 되었는데 절대 나와 같은 고충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말 신중하게 지었다.


가끔 고향집에 내려가면 부모님을 '효순엄마'와 '효순아빠'로 부르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제는 일말의 내 옛 모습이 남들이 부르는 우리 엄마와 아빠의 호칭에 묻어나는 것 같아서 내심 좋을 때도 있다. 그때 그날의 내 모습은 그 이름으로 불려야만 기억될 수 있는 것들이니까.


나는 앞으로도 누구 엄마보다 어여쁜 내 이름 석자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평생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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