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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다 Aug 29. 2023

말 너무 많아서 미안합니다

그 말, 몇 번째인지 알아?

Image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접니다, 그 말 많은 사람이요.


신랑 따라 거처를 옮기다 보니 연고가 없다 싶이한 곳에서 삽니다. 가까운 곳에 동창이 있으나 왕래를 자주 할 정도로 친하지는 않아서 이곳에서 산 지 4년이 되어가는 데 딱 한 번 만나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이곳에서 제 유일한 말동무는 신랑입니다. 그리고 아주 어린 아기가 1명 더 있는데 시시콜콜 이야기하기엔 아기가 두 돌도 안 됐습니다. 말이 많은 엄마 덕인지(?) 옹알이만으로도 말이 많고 말귀를 잘 알아듣고 표현도 곧 잘, 제법 하는 것 같습니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말 많은 성향은 친정 가족들 특징인 듯합니다. 과거 저도 동생도 부모님도 하교하고, 퇴근하면 서로 저녁식사 자리에 모여 앉아 하루를 보내면서 생긴 에피소드들을 서로 꺼내기 바빴었습니다. 청중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내가 말할 타이밍을 보기 위해 엉덩이가 들썩 거리기도 했죠.


부모님과의 대화는 특히 제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매우 큰 도움이 되었고 저는 그런 시간을 너무 좋아합니다. 여러 상황들을 간접경험하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며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가족들과 모이면 언제나 그랬듯 이런저런 이야기하기 바쁘죠. 참 소중하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저희 친정 가족들만의 에피소드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말 많은 저는 유일한 말동무인 신랑에게 가족에게 그랬듯이 하루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를 합니다. 대부분 뉴스, 핫이슈, 아기의 어린이집 생활, 아기의 발달 변화, 전하고 싶은 이야기 등등입니다.


오늘도 평소처럼, 아니지 이젠 습관인 건가 싶습니다.

신랑에게 오늘 결정한 제 스케줄과 더불어 만나게 될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순간 저희 신랑은 입을 꾹 닫고 큰 눈으로 저를 보며 손가락으로 V를 그렸습니다.


‘그 친구 이야기 두 번째야’

라는 표현을 제가 두 눈으로 명확히 확인할 수 있게 손가락으로 표시한 거죠. 순간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만 말해, 그 입 다물어, 듣고 싶지 않아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신랑은 했던 말 또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했던 이야기를 또 할 때면 말하는 도중에 손가락으로 몇 번째인지 표시를 하거나 혹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거 몇 번째 말하는 거라고 알려줍니다. 처음엔 아 그냥 좀 들어주면 안 되나 싶었는데 잘 생각해 보면 싫어하는 행동을 했으니 싫다는 표현을 하는 것도 맞는 것 같습니다.


제가 쫑알쫑알 한참을 이야기하면 말미에 “오늘 털어야 하는 수다양 다 털었어?”라고 장난 삼아 이야기도 하고 때로는 “난 들려줄 에피소드가 많지 않은 것 같아, 회사 일이 그렇지 뭐, 재밌는 게 없네?” 라면서 할 이야기가 없다는 점에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했었습니다.

아 나는 그저 내가 이야기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 뿐인데 부담감을 느끼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은 신랑의 V에 순간 기분이 나빠서 툭 내뱉었습니다.


“여봉이는 늘 그렇게 하드라, 참 말할 맛 안 나게”

“내가 했던 말 또 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 그건 존중해 줄 수 없는 거야?”


맞는 말이라서 크게 할 말이 없었지만 지지 않고 또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행동하면 대화가 어려워지지. 흠 근데 여봉이 입장은 존중하는 게 맞아. 앞으론 웬만한 이야기는 했다고 생각한 다음에 해야 하는 말만 할게”


토라진 마음을 담아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전 싱크대가 번쩍 거리도록 속상한 마음을 담아서 또 주방청소를 벅벅했고 신랑은 제가 기분 나쁜 것 같아 보인다는 말을 남기고 소파에 누워서 좋아하는 유튜브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제가 말을 안 하는 게 가장 베스트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했던 말인지 제가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 아기를 낳으면 뇌도 같이 낳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인지 출산 이후 유달리 잘 까먹습니다. 당장 물건도 어디다 뒀는지 순간 잊는데 과거에 한 말을 기억할리가...


고로, 해야 하는 말 외에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게 되었습니다. 수다쟁이인 제가 말수를 줄이고 최대한 말을 아껴야 신랑을 존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말이 없는 사람이 말을 하는 것보단 말 많은 사람이 말을 참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저희 신랑은 무뚝뚝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 몸개그에 호응하기도 하고 유달리 활발한 성격에 맞춰주느라 몸치인 신랑이 춤을 추기도 하며 밤에 서로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속 깊은 이야기를 할 때도 많습니다. 그저 제가 혼자 떠드는 게 너무 잦다 보니 신랑이 싫어하는 행동을 많이 하는 겁니다. 아까 있던 에피소드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랑 입장에서는 제가 본인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싫은 행동을 또 했을 때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겠다 싶어 미안한 마음도 크게 듭니다.


근데 오늘 밤은 참 속상하더군요. 이 지역에서 친해진 동네친구 하나 없는데 나는 누구랑 말하냐!!! 싶기도 하고 했던 말 또 하는 습관적인 대화는 끊어야 할 것 같으니 한 번 더 생각하고 참아도 보고 삼켜도 보고 갖은 방법을 다 써봐야겠다,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글로 남길까 휘발성 짙은 이야기까지 쓰자니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는 걸까 참 고민되는 밤입니다.


-


“우리 주말에 후임네 커플 만나기로 한 거 토요일에는 바쁠 것 같다고 해서 금요일이나 일요일에 보자고 했어!”


“아 그래? 근데 금요일에 보면  나 이마 꿰맨 채로 만나?”

(금요일 수술 예정입니다)


“아 맞다! 아!”


시시콜콜 이야기한 것들은 기억해서 몇 번 말했다고 손가락으로 친히 표시까지 해주면서 내 수술 날짜는 말도 하고 메시지도 남겼거늘 홀랑 잊은 거니.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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