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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다 Apr 20. 2023

여보야, 하고 싶은 거 없어?

골똘히 해본 생각

결혼에 대한 나의 로망 중 하나는 부부 공통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이었다. 물론 둘이 매일같이 살 부대끼며 사는 삶이 늘 즐겁겠지만(?) 일상을 벗어나 함께 푹 빠져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

신랑은 스키마니아였는데 계절영향이 큰 취미생활이라 겨울이 아니고서는 타러다니는 게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나는 공연 보러 다는 걸 좋아하는데 대형작품을 좋아하는지라 비용적인 측면에서 다소 부담스러웠다. 활동적인 걸 하고 싶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은 신랑이 먼저 제안했다. "자전거 탈 줄 알아?"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동네 내 또래 친구들은 21단 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21단이 뭔지도 모르면서 21단 자전거가 왜 이리도 갖고 싶었는지(내 기억 속 자전거는 21단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초등학교 고학년이 탈 수 있는 자전거가 맞나 싶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밝게 인사하는 걸 어여삐 여겨주시던 경비아저씨께서 늘 자전거를 얻어(?) 타고 다니던 나에게 친구들 못지않게 멋진 자전거를 한 대 선물해 주셨다. 아파트 내 보관소에 주인을 잃은 자전거들이 즐비했는데 몇 대를 분해해서 멀쩡한 부품들만 모아 아예 새로운 자전거 한 대를 만들어 주셨다. 아니지 한 번 도둑맞았고 또 만들어 주셨으니 총 두 대구나! 여하튼, 여봉아 나 자전거 무지 잘 탄다?


따사로운 봄날의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오는 나를 역에서 기다리던 신랑이 곧장 자전거샵에 가자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 21단 자전거 사주는 거야?" "아니 더 좋은 거 사줄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같이 자전거 취미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부부 자전거로 처음 들이게 된 자전거는 메리다. 입문용으로 아주 좋은 브랜드라고 하기에 냉큼 질렀다.

언 20여 년 만에 앉아 본 안장은 생각보다 무서웠고 허벅지 터져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헉헉 거리면서도 내달리는 기분의 짜릿함은 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관심사가 생기면 정말 깊숙이 파고드는 신랑 성격, 자전거가 타깃이 되었다. 메리다를 그리 오래 타고 다니지 않았는데 꼭 갖고 싶은 자전거가 생겼다며 수시로 공홈에 들어가 이 색상 저 색상을 입혀보며 여러 옵션들을 광클하던 신랑. 머지않아 새빨간 트랙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다. 나보다 점잖았던 신랑에게 똥꼬 발랄함을 엿볼 수 있었던 계기이기도 했다. 이후 나는 임신을 하게 되면서 내 자전거는 팔려갔고, 신랑은 지역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진짜 취미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한동안 집-회사 밖에 모르던 신랑이 틈나는 대로 자전거를 타는 걸 보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라이딩 후 집으로 돌아와 아주 말랑말랑해진 뱃살을 헤헤- 웃으며 만져보라는 신랑을 볼 때면 어찌나 웃기던지. 그리고 지금은 BMC 자전거를 소유 중이다. 저게 얼마더라.



퇴근 후 혹은 쉬는 날 자전거를 일정이 잡히면 늘 미리 나에게 허락을 구하는 신랑이 어느 날은 물었다.

"여보야, 하고 싶은 거 없어?" 그러게 말이야. 나 뭐 하고 싶어 했더라. 임신과 출산을 겪고 나니 나에게 남은 건 비실비실해진 내 몸뚱이와 내 머릿속을 가득가득 지배하는 아기 생각. 매일 같은 고민에 고민을 낳고 있는 오늘 저녁밥은 무얼 해야 하는가? 갑자기 억울했다. 육아를 늘 함께 해주는 신랑이 너무 고마웠지만 출퇴근, 육아, 취미생활까지 다 함께 하고 있는 신랑이 갑자기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하고 싶은 게 뭔지 떠오르질 않아서 그게 더 짜증이 났다. 내가 알던 내가 아닌 게 이렇게 드러나는 것 같아서.


나 공연 보는 게 되게 좋아하는데. 티켓 예매해 두고 디데이 기다리는 거 그거 진짜 설레고 재밌는데. 공연 보고 난 뒤에 여운이 굉장히 길게 남는 나는 공연 넘버를 흥얼거리며 그 여운을 즐기는 거 또한 매우 좋아한다. 근데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건 공연 보는 게 아니었다. "나 아무도 없는 아주 고요한 곳에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정말 푹 자다가 나왔으면 좋겠어" 신랑은 나를 아무 말 없이 그냥 끌어안아줬다.


1분 1초 단위로 하고 싶은 게 바로바로 생각이 났던 나는 결혼 이후 사람이 참 많이 달라졌음을 내 스스로가 느끼고 있다. 근데 아주 잠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나보다 아기, 그리고 우리 가족이 우선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냥 이 또한 지나갈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기폭제가 된 듯한 신랑의 질문에 오늘도 골똘히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내가 이루고 싶은 게 뭔지, 그래서 내 목표는 뭔지, 궁극적으로 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기타 등등.


생각에 꼬리를 물고 물다 보니 뭐라도 해야겠다며 쉴 새 없이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신랑이 다시 물었다 "자전거 타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내가 어디서 봤는데 여자들은 자전거가 예뻐야 한데. 마음에 쏙 들어야 한데. 왜냐면 너무 예뻐서 타고 싶어 진데. 다시 한번 찾아보는 거 어때?" 당장 산다고 해서 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다시금 나랑 공통의 취미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신랑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신랑은 당장이라도 사줄 기세로 서치를 시작했다.


육아를 하는 엄마들에게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어보면 대부분 비슷한 대답을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모를 정도의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요즘 이 질문마저도 사치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래도 나에게 먼저 물어봐준 신랑이 참 고맙다. 그리고 신랑 덕분에 나는 다시 나를 찾는 데에 시간을 할애하기로 마음먹었고 눈에 띄는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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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거 다 해주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너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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