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도 Sep 20. 2021

나중에 볼 동영상 1,112개에 대한 반성

유튜브가 반성할 일인지, 내가 반성할 일인지 참

매일 밤 침대에 모로 누워 핸드폰 화면을 위에서 아래로 당기기를 반복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왜 이렇게 볼 게 없는지를 불평하고, 왜 나는 그나마 재미있는 것들을 낮에 다 봤어야만 했는지를 후회한다. 새로고침을 마흔네 번쯤 하고 나면 이제는 어플도 나한테 질려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그냥 아무거나 좀 봐라 쫌.’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는 <나중에 볼 동영상> 탭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들어가기만 할 뿐 그곳에서 다음에 볼 동영상을 고르게 되는 일을 드물다. 도대체 어떤 악마 같은 개발자가 이런 기능을 만든 것인지. 원래의 의도가 어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내 인생에 도움은 될 것 같으나, 지금 당장 보기에는 너무 지루할 것 같은 영상들을 모아두는 곳으로 사용 중이다. 나중에 볼 동영상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것은 알았다만 벌써 1,000개가 넘어가고 있는 줄을 꿈에도 몰랐다.      


이 탭에만 들어오면 엄청난 부채감과 후회에 숨이 턱턱 막힌다. 볼 게 없다고 마흔네 번의 새로고침을 할 시간에 여기 있는 세계사 강의를 하나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평균 스크린 타임이 4시간이 넘어가는 요즘 나중에 볼 동영상은 차곡차곡 쌓여갔고, 내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사실에 텅 빈 머릿속이 지끈지끈하다.      

다른 이들의 나중에 볼 동영상 탭에 얼마나 많은 수의 동영상들이 기록되어있는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런 결과에 꽤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왜, 도대체 어쩌다 1,000이라는 숫자를 넘을 수밖에 없었는지 나름의 분석을 해보았다.      


첫 번째, 지긋지긋하고 비뚤어진 완벽주의 성향 때문이다. 완벽주의는 완벽이라는 말 때문에 긍정적인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하나, 나로서는 가장 떼어내고 싶은 나의 나쁜 성격 중 하나다. 대부분 나중의 볼 동영상들은 자기 계발과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완벽히 준비된 상태에서, 예습과 복습을 하며 듣고 싶다는’ 망상에 빠져 단 한 번의 재생 버튼을 누르지도 못한 채 방치된 동영상들이 쌓여가고 있다.      


두 번째, 당장의 도파민을 필요로 하는 삶 때문이다. 절에서 살던 시절 스트레스가 0을 넘어 마이너스에 가까웠을 때 퇴근 후 지금의 내가 보았을 때 굉장히 고무적인 삶을 살았다. 명상을 하고, 요가 수련을 하고, 역사 강의를 들으며 필기도 하고, 전시 리뷰도 찾아보면서. 하지만 도시에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많은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고, 이 스트레스를 풀어낼 모범적인 방안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즉각적인 자극을 주어 내 스트레스를 잠시 잊게 해 줄 영상들만 죽어라 보고 있는 것이고, 때에 맞춰 유튜브에 ‘Shorts’라는 더 악마 같은 기능이 생겨 내가 나가지만 않는다면 가만히 있어도 무한으로 영상을 공급해주기까지 하니 늪에 빠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무한한 새로고침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중에 볼 동영상’들을 해치워보려고 한다. 이 규칙이 지켜지기만 한다면 나의 핸드폰 사용량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거나, 정말로 나중에 볼 동영상들이 본 동영상으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도 긍정적이다. 과연 1,112개 중 얼마나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기대가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씨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