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을 제대로 공부한 의사도 아니고 우울증 약을 제대로 공부한 약사도 아니지만, 우울증을 앓고 있고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는 환자다. 오늘은 우울증과 우울증 약에 대해 내가 알게 된 사실을 조금 적어보려고 한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며,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을 사전에 말해두고 싶다. 기록을 위한 기록일 뿐이다. 새롭게 약을 복용한 지 반년이 지나가고 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스스로 정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1. 극심한 우울증은 기억을 삭제하기도 한다.
내가 가장 심하게 우울증을 겪고 있을 당시의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다. 그 당시의 기억이 괴로워서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시간이 쌓여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오랜 시간, 약 반년에서 일 년 가까이 되는 시간의 기억이 매우 희미하다.
2. 상황이 바뀌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우울은 병이다.
나는 내 우울이 내 비참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복약을 거부한 기간이 길다. 그래서 떠나보았다. 그 현실을. 우울의 강도와 빈도가 줄어들기느하였으나 기저에 깔려있는 우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한 현실과 괴로운 자아 사이에서 괴로워하기도 했고,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3. 상담은 도움이 되지만 복약을 하면 더욱 도움이 된다.
복약을 거부하는 동안 상담을 약 8회 정도 받았다. 한 시간의 상담 중 매번 반 이상의 시간을 거의 울기만 하다 나오는 일이 잦았다. 상담을 받고 펑펑 울고 나오면 약 한 시간 정도 정말 머리가 개운했다. 24시간 내 말을 저렇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복약은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 선생님은 상담이 끝나갈 무렵 항상 복약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하셨고, 그때 좀 더 일찍 그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나의 단점 중 일부는 우울증의 현상일 수도 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습관 행동, 생각, 여전히 많기는 하지만 약을 먹고 있는 지금과 과거를 비교하면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 오랜 시간 우울증을 방치해왔기 때문에 우울증에서 비롯된 현상들을 나의 단점으로 생각하고 또 그것이 자기혐오와 깊은 좌절을 일으키는 악순환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복약을 시작한 뒤 잘 살펴보니 나는 생각보다 부지런했고, 똑똑했고, 열정이 있었다.
4. 우울증 약은 꽤 바로 효과가 나타난다.
꼬박꼬박, 매일매일 잘 챙겨 먹는다는 조건을 잘 지킨다면 우울증 약의 효과는 매우 크고 빠른다.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약들을 바꿔가며 복약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나의 경우 처음 처방받은 약이 잘 들어 복약 전 한 주와 복약 후 첫 주의 인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복약 전에는 쓸데없이 희망찬 말들이 어이없게 느껴졌지만 복약 후에는 밑도 끝도 없는 불행의 말들이 더 어이없게 느껴진다는 게 내가 느낀 가장 크고 빠른 변화였다.
5. 우울증 약은 살을 찌게 만들기도 한다.
우울증 약을 복용한 지 반년 약 10킬로 정도 체중의 증가가 있었다. 우울증 약이 체중 증가에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의가 있는 것 같지만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약 5킬로에서 30킬로 범위 내에 체중 증가가 발생한 환자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실제로 내가 다니고 있는 병원에서도 체중 증가에 대한 부분을 고려하여 처방중인 약의 성분 또는 용량을 조절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