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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도 Jul 04. 2024

이 풍경을 보러 네팔에 왔구나

네팔 여행기

넷째 날

ABC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마차푸차레를 눈에 담고 싶었는데 가이드가 구름이 많다고 했다. 어제 저녁 내내 비가 오더니 구름이 아직 자리를 비켜주지 않았나 보다. 아쉬운 마음에 짐을 싸고 있는데 가이드가 다시 들어오더니 구름이 개고 있다고, 지금 나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가이드는 우리를 사람들이 적은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봉우리들은 어제보다 선명히 보였다.


ABC에서

’그래, 내가 이 풍경을 보러 네팔에 왔구나.‘


풍경에 넋이 나가서였을까 더 이상 춥지 않았고, 그냥 그곳에서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을 거 같았다.


유일하게 안나푸르나 1봉은 어제도, 오늘 아침에도 볼 수 없었다. 아니 안나푸르나 1봉이 나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ABC에는 안나푸르나 1봉을 오르다 별이 된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님의 추모비가 있다. 죽을지도 모르는 도전을 하는 그 마음은 어떤 걸까. 아마 나는 평생 알기 어렵겠지. 괜히 아쉬운 마음에 추모비 앞을 서성였다.


히말라야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하산하면서 보니 ABC 표지판 뒷 면에 “See you again"이 써져있었다. 나는 히말라야에 다시 올까? 모르겠다.


하산을 한다는 기쁨과 더 이상 고산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안도의 마음에 신이나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도 소소한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괜찮았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나는 이미 지나간 곳을 다시 걷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등산보다는 둘레길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데 워낙 긴 거리를 걸어서인지 다시 보아도 아름다운 길이어서인지 지루하지 않았다.


내려가는 길


오늘은 시누아까지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일행이 내려오면서 무리를 했는지 무릎이 아파 밤부에서 급히 숙소를 잡았다.


우리는 원래 ABC 트래킹을 끝내고 바로 마르디히말 트래킹을 가려고 했는데 친구는 도저히 못 가겠다고 했다. 혼자서 갔다 올 수도 있었지만 친구와 같이 온 여행이기도 했고, 가이드도 친구와 같이 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 나도 하산하기로 했다. 가이드가 “같이 가자, 우리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해줬다면 다른 결정을 했을까? 친구는 내가 고민하니 처음에는 원하는 데로 하라고 하다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같이 가자고 말해주었다. 그게 고마웠다.


다섯째 날

급히 숙소를 예약하다 보니 1인실에서 2명이 자야 했고 당연히 불편했다. 아마 잠을 가장 잘 못 잤던 밤이 아닐까 싶다. 도저히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별이라도 보려고 나갔는데 구름이 하늘을 가득히 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계획한 만큼 걷지 못해 오늘은 평소보다 1시간 일찍 출발했다. 걷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한 번씩 뒤를 돌아봤다. 어제 보지 못했던 안나푸르나 3봉이 보였는데 오늘따라 하얀 하늘에 어디까지가 산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알기 어려웠다.


아쉬운 마음에 계속 뒤돌아본다


시누아에서 촘롱을 가기 위해서는 산을 내려가 협곡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넌 후 계속 위로 올라가야 한다. 춤롱에서 시누아로 갈 때는 계단이 많았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그 길을 올라가려니 힘들었다. 저기가 끝이겠지 해서 올라가면 또 계단이 있고 또 계단이 있었다.


가는 길에 포터 4명을 만났는데 1명이 모든 짐을 들고 있는 듯했다. 3명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가이드가 그들에게 물어보니 250루피를 주고 한 사람에게 오르막길 끝까지 가방을 맡긴 거라고 했다. 나름의 사정이 있기는 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기에 포터가 하루에 버는 돈이 그리 많지 않은데 그것을 쪼개서 한 사람에게 주고 자신의 일을 맡긴다는 게 느낌이 참 이상했다. 결국 돈이 필요한 사람이 더 많은 노동을 하게 된 거겠지.


알고 보니 지누단다는 온천으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ABC 트래킹을 끝내고 하산하는 길에 지누단다에서 하루 머물며 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끝이다!

지누단다를 연결하는 긴 다리를 다시 건너고 땅을 밟았을 때 드디어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런데 아무도 축하를 안 해줘서 어정쩡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내 뒤로 도착하는 사람들도 아무런 축하를 받지 못하기에 내가 축하해 주었다.


트래킹은 끝났지만 포카라까지는 다시 지프를 3시간 정도 타야 한다. 지프 타는 곳으로 가니 트래킹 하면서 몇 번 만난 사람들이 같이 지프를 타자고 했는데 가이드가 안 된다고 했다. 나중에 윈드폴 사장님에게 여쭤보니 지프 운전사들 사이에 카르텔이 있어 그렇게 셰어를 하면 싸움이 날 수 있다고 했다. 지프 운전자들에게는 5명이 한 차를 타는 것보다는 2명이 한 차, 3명이 한 차를 타는 게 좋은 거기 때문이다.


포카라에 도착해서는 빠르게 씻고 로비에서 저녁을 먹었다. 매일 비슷한 음식만 먹다가 먹고 싶은 걸 먹으니 좋았다. 우리가 너무 잘 먹고 있어서였을까 사장님이 밥, 김, 파김치, 들깨로 볶은 야채 볶음을 주셨다. 평소에 쌀을 잘 안 먹는데도 그날따라 밥이 술술 들어갔다. 아마 둘이서 3인분은 먹은 거 같다.

하산 후 저녁

맥주도 마셨겠다, 나른한 기분으로 소파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니 정유정 작가님의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 안나푸르나 갈 거야.” 선택사항이 아니야. 생존의 문제라고.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한창 힘들었던 시기에 히말라야에 가겠다고 결심한 건 어쩌면 나에게도 히말라야에 가는 건 생존의 문제였던 거 같다. 물론 히말라야 한 번 갔다 왔다고 내가, 나의 상황이 변하는 걸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이 시간들이 오롯이 남아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겠지. 짧은 4박 5일 동안 보았던 풍경, 했던 생각, 만났던 사람들을 마음 속에 간직해야지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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