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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도 Oct 17. 2022

Day 01. 여행의 설렘과 힘듦

이탈리아 36일 여행기

22.09.06

서울 -> 로마 이동

로마 -> 나폴리 이동


숙소 - AirBnB (https://www.airbnb.co.kr/rooms/37004237)



태풍 뉴스로 소란스러웠던 게 거짓말인 듯 공항 가는 길의 하늘이 너무 아름다웠다. 비가 오면 산책을 가기 싫어하지만 실외 배변만 하는 강아지와 살고 있어 전날까지 마음고생을 했는데 다행히 아침에 마지막 산책을 갔다 올 수 있었다.


22살의 첫 유럽 여행 이후, 다시 유럽에 갈 기회가 있을까 했다. 25살의 두 번째 유럽 여행 이후에는 정말 다음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일을 시작하면 길게 쉴 수 있는 기회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30살에 세 번째 유럽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것도 37일간의 여행을. 이번 휴가를 위해 올해에는 팔에 깁스를 해도, 친구들과 여행을 가도 하루를 온전히 쉬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휴가는 총 16일. 휴일이 많은 10월을 이용하고 내년 휴가까지 미리 사용한다면 갔다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퇴사한 상태이다. 여행 가기 전 즈음에 회사가 인수되면서 담당하던 서비스가 바뀌었었다. 그러면서 다 같이 하던 일들을 마무리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왠지 지금 잘 정리하고 나오고 싶었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던 중요한 건 퇴사를 했다는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방학을 제외하고 한 번도 길게 쉬어본 적이 없다. 한 학기 휴학을 하긴 했지만 한 달에 40만원을 받으며 인턴을 했고(이 돈으로는 첫 번째 유럽 여행을 갔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바로 대학원을, 대학원 졸업 후에는 바로 취업을, 그리고 또 바로 이직을 한 번 했다. 그래서 지금 같이 소속된 곳 하나 없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모르는 상태는 처음이다. 퇴사는 정말 나 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좋아하는 퇴사 짤, 어쩌면 나는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항상 회사에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내가 해왔던 것들에 대한 생각은 미뤄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그려보고 싶다. 그때마다 하고 싶은 걸 하는 성격에 미루어 두었던 고민들을 드디어 펼쳐 볼 예정이다. 그렇다고 너무 거창하지는 않게, 적당히 가법고 적당히 진지하게 말이다.


성인이 되고 첫 배낭여행을 인도로 시작해버리는 바람에 주변 다른 친구들과는 여행 스타일이 조금 다른 편이다. 캐리어 대신 배낭을 메고, 풍족하지만 짧고 계획적인 여행보단 힘들지만 길고 즉흥적인 여행을 선호한다. 그런데 이번 여행 준비를 하면서 내가 변했다는 걸 체감했는데 예전 같으면 기차를 탔을 걸 비행기를 예약하고, 숙소도 미리 예약하고, 차도 빌리는 등 준비를 많이 했다. 항공권과 첫째 날 숙소만 예약하고 떠났던 지난 여행들과 비교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J가 된 것이다. 이젠 고생을 하기 싫나 보다. 짐도 많이 챙겼다. 괜히 이상한 바람이 들어서 글을 쓰겠다며 키보드와 굳이 여행 중에 운동하겠다며 운동복을 챙겼다. 나이가 들수록 비울 줄 알아야 하는 데 욕심만 많아진다.




첫 번째 유럽 여행에서 마지막 도시는 로마였다. 무엇을 할까 찾아보니 당시에 사람들은 하루 시간을 내어 남부 투어를 갔다 왔다. 폼페이와 아말피, 포지타노까지 보고 오는 투어였다.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많은 도시를 하루에 보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 그래서 다짐했다. 내가 꼭 이탈리아 남부를 보기 위해 다시 오겠다고. 


찾아보니 이탈리아에는 내가 가지 않았지만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남부에 시칠리아, 돌로미티, 토스카나까지 포함했다. 거기다 이탈리아에만 있으면 왠지 심심할 거 같아 오스트리아 4일과 뮌헨 1일을 추가했다. 오스트리아는 그냥 이탈리아 위에 있는 나라인데 안 가봐서, 그리고 뮌헨은 옥토버페스트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래 이탈리아 남부 여행이 컨셉이었는데 그냥 이탈리아 여행이 되어버렸다.


여행이 오랜만이라 공항에 도착해서도 이탈리아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공항에서 테르미니역까지 가는 길에는 어떤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시칠리아를 가고 싶었는데 남편 때문에 이번에도 피렌체를 세 번째 간다며 투정하시는 여자분과 왜 피렌체에 가야 하는지 조곤조곤 설명하시던 남자분이셨다. 두 분이서 동시에 각자 할 말을 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으셨는데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마치 내 모습을 다 보여주면서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찾은 느낌이랄까.


비행기가 연착될 수 있기 때문에 테르미니역에서 나폴리 중앙역까지 가는 기차는 예약하지 않았다. 워낙 자주 있기에 그냥 우리나라에서 기차 타고 대전 가는 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격이 이게 뭐람. 1시간이 걸리는 고속 기차는 거의 50 유로, 2시간이 걸리는 완행 기차는 30유로였다. 출발 시간에 임박해서 표를 사려고 하니 가격이 오른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돈을 시간으로 샀다. 퇴사도 했겠다. 나에게 남은 건 시간뿐. 하지만 나폴리 중앙역에 늦게 도착해 한 마음 고생까지 하면 맞는 교환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워낙 흉흉한 소문이 많은 나폴리이기에 기차역에서 바로 연결되어 있는 지하철을 타고 숙소까지 이동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차는 15분 연착이 되었고 나폴리에 도착하니 11시 40분이었다. 기왕 돈 아낀 거 오늘 택시를 탈 수 없다는 이상한 논리에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가 다행히 바로 있어 타기 위해 주변 신경 안 쓰고 뛰어가니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버스 시간과 실제 버스 시간이 맞지 않는 곳이었고 그렇게 버스를 놓쳤다. 퇴사 날에 같은 팀원분께서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원래 걱정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버스 한 번 놓친 일로 발을 동동거리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무서울 게 없었는데 요즘은 무서운 것뿐이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힘들었다는 말만 중얼거리다 이 힘듦을 더 크게 내뱉지 않는다면 그 다음 날까지 힘들었다는 말만 계속할 거 같아 헐레벌떡 글을 썼다. 여행 첫째 날의 나의 설렘과 힘듦이 잘 담기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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