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공주
무수리는 그만!
땡 처리 항공권을 찾느라 며칠 밤을 검색하고 호텔 비교 사이트에서 더 싼 방을 찾는 저렴한 여행에 길들여진 나의 이번 여행은 공주였다.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내려 환전을 하는데 여직원이 벽에 붙은 크루즈 관광을 권한다. 나도 마침 크루즈 여행을 왔고 이미 예약을 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어느 크루즈냐고 묻기에 말해줬더니 놀라면서 엄지 척을 한다. 내가 예약한 크루즈는 1년도 안 된 새 거인 데다 4층짜리 큰 배라 무지 좋을 거라고 한다. 5 Star라며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더니 아까와 다른 시선으로 나를 본다. ‘저 사람들 부자인가 봐’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았다. 불안감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홈페이지 사진이 그럴듯한 뽀샵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안끼엠 호수 근처 작은 호텔에 짐을 풀자 비가 많이 내렸다. 6월의 베트남은 우기에 접어들어서 소나기성 호우가 자주 내린다. 우산보다는 우비가 훨씬 많은 시내 풍경이 이색적이다. 시내 구경을 하고 호수 야경을 보며 돌아다녔다. 밤늦게까지 여자들끼리 다녀도 위험하지 않다.
다음날 아침, 우리를 픽업하기 위해 크루즈 측에서 보낸 리무진 버스가 호텔 앞으로 왔다. 우리나라의 미니버스 정도의 크기인데 내부는 우등버스용 좌석 7석으로 채워져 있다. 7명을 태우고 2시간 반 정도를 갔다. 좌석이 넓고 푹신해서 승용차보다 승차감이 더 좋았다.
하이퐁 선착장에 도착해 작은 쾌속정을 타고 하롱베이 섬들이 시작되는 곳으로 이동했다. 멀리 깔끔하고 웅장한 크루즈가 보였다. 십여 명 정도의 승무원들이 갑판으로 마중 나와 손을 흔들고 서 있다. 조금 우스웠지만 기분이 좋았다. 배에서 크루즈로 옮겨 타니 매니저가 일정에 대한 설명과 함께 방 열쇠를 나누어 준다. 아래층 우리 숙소의 문을 여는 순간 비명과 탄성을 질렀다.
넓은 침대 옆의 통 유리창에는 하롱베이 섬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1박 2일 내내 감탄스러웠다. 베란다로 나가니 비취용 베드 2개가 나란히 있다. 누워서 감상하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더위 때문에 나가 있지는 않았다. 대신 에어컨 빵빵한 방의 침대에 누워 영화처럼 흘러가는 섬들을 볼 수 있으니 썬베드는 아쉽지 않았다.
욕실에는 넓은 자쿠지 욕조가 큰 유리창 앞에 놓여있다. 그 날 저녁 욕조에 물을 받고 거품을 만들고 하롱베이 풍경을 보며 맥주를 먹는데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었다. 옷장과 책상, 욕실의 수도꼭지나 샤워기까지 고급스럽다.
방에 감탄하는 동안 점심식사 시간이 돼서 연회장으로 올라갔다. 넓고 깨끗했다. 작고 앙증맞은 애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연어스테이크 코스 메뉴가 제공됐다. 앉은자리에서 흐르는 풍경을 보며 천천히 점심을 즐겼다.
우리가 배에 탄 순간부터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배는 계속 앞으로 가고 있었지만 물 위인지 땅 위인지 느낄 수 없을 만큼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하롱베이의 400여 개 섬들은 이미 너무나 많이 알려지고 크고 작은 배들이 넘쳐서 우리가 탄 크루즈는 하롱베이 뒤쪽으로 가는 코스였다. 간간 멀리서 다른 배 들이 보이지만 마치 나 혼자 섬을 예약한 듯 한가로웠다.
점심 식사 후에 Ba Trai Dao 해변에서 카약킹을 했다. 조용한 물 위에 빨갛고 파란 카약들이 둥실둥실 떠서 멀리 노 저어 간다. 우리의 주홍색 구명조끼는 겹겹이 섬들에 원색 점을 찍으며 멋진 풍경을 완성하고 있었다. 참 맑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시곗바늘을 잡아 놓은 듯 바쁘지 않은 마음으로 노를 저으며 가까이에서 섬들을 느끼고 크루즈로 돌아왔다.
방에서의 휴식시간이다. 비가 와도 멋있겠다 말하는데 거짓말처럼 소나기가 내린다. 큰 창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멜로디를 만들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초록 섬이 무채색으로 변하며 가까운 섬에서 먼 섬까지 회색의 명암 단계표를 보는 듯했다. 너무나 신비로운 수묵담채화를 보니 비가 그치지 않아도 좋을 거 같았다.
배의 맨 꼭대기인 옥상 정원에는 스탠드 바가 있고 인조 잔디가 깔려 있다. 분위기에 맞게 칵테일을 주문했다. 쿠킹 클래스 시간이다. 요리사가 월남쌈 재료들을 준비해 주고 쌈 싸는 법을 알려준다. 이미 국내에도 하노이 쌀 국숫집이 많은 터라 쉽게 쌈을 몇 개 싸서 안주로 먹었다.
하늘이 점점 짙은 파랑이 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매직 아워가 되니 낮과 다른 감동이 왔다.
섬들은 밤하늘 색에 흡수되면서 사라지고 멀리 있는 배들에서 불이 켜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불빛들은 트리처럼 배를 비추고 있었다. 저녁은 베트남식 뷔페다. 칵테일에 살짝 취기를 느껴서 흥이 났다. 식사하는 동안 매니저는 내일 오전 일정을 설명했다. 내일 아침은 간단히 먹고 7시 50분에 작은 배에 갈아타고 동굴 탐험을 간다고 한다. 몇 번이나 시간을 강조했고 아침에 방마다 노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찍 일어나야겠구나 생각했다. 식사 후 방으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 편하고 느긋하게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산봉우리도 흰구름도 나도 물 위에 떠 있었다. 신비롭다. 준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갔는데 사람들은 없고 멀리 배 하나가 빠르게 없어졌다. 아차 싶었다. 중국인 노부부가 우리처럼 멍하니 서있다. 나와 크루즈에서 1박 2일을 함께하는 일행은 약 30명 정도였는데 중국 유럽 일본 홍콩 등 다국적이었고 한국사람은 우리뿐이었다.
당연히 모든 설명은 영어로 진행됐다. 친구들이 영어 울렁증이 있다 해서 잘하지도 못하는 내가
통역을 했는데 7시 50분이 아니고 7시 15분이었다. 세븐 피프티가 아니고 세븐 피프틴…! 너무나
미안하고 아까워서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놓친 동굴 탐험하러 다시 오자고 위로하면서 크루즈 내부를 돌아다니다 뷔페식 아침을 먹고 다시 7인승 벤을 타고 하노이로 돌아왔다.
조용히 흐르는 물 위에서 궁궐 같은 배를 타고 공주의 침대에 누워 그림 같고 영화 같은 풍경을 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같은 1박 2일을 보냈다. 크루즈 여행을 한 번쯤 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이 이번 짧은 하노이 여행으로 이루어졌다 만족한다. 1인당 30만 원 정도에 이 정도 럭셔리는 베트남이라서 가능한 거 같다.
좋은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가족 생각이 나는 걸까? 복잡하고 소란스러워서 절대 여행을 가지 않겠다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나를 공주로 만들어준 그곳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왕 같은 하루를 드릴 수 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분명히 아버지는 그 여유로움과 경이로운 풍경에 수다쟁이가 되셨을 거다. 아버지의 복잡해서 안 가시겠다는 말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신 노래 가사의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그랬다. 이 풍경만큼은 보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 여행은 다른 여행보다 감사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공주 같은 과분한 하루였기 때문일까, 집으로 돌아가면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하롱베이 바다처럼 느리게 평온하게 살아보자고 생각했다. 하노이 공항이 땅으로부터 멀어진다. 다크 앤 브라잇 동굴이 나를 기다려 줄 거 같다.
지난 6월의 베트남 여행은 나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버킷리스트에 있던 크루즈 여행은 이루기 힘들거라 생각했는데 비슷하게 흉대라도 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