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있는 나라에서는 봄을 생각할 필요가 없겠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바뀐다. 프로필 사진에 벚꽃이 등장하고, 대화에도 '봄'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4월이다.
"한국은 이제 봄이야. 거긴 어때?"
4월을 '봄'이라고 일컫는다면 한국과 같은 날짜인 태국 이곳도 '봄'일 것이다.
'봄'이라고 하면 따뜻해져서 부츠를 벗고 가벼운 스니커즈나 슬링백을 꺼내는 시기, 두꺼운 재킷을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시기, 벚꽃이 피어 여기저기 분홍분홍 예뻐지는 시기,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레고 기쁜 시기이다.
아마도 봄이라고 하는 것이 '4월=봄'이라기보다는 '기온이 이전에 비해 높아지고 꽃들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그 어느 때'일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때만 되면 봄이 돌아오던 한국에서 살 때에는 '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볼 필요는 없었다. 당연하게 찾아왔고 자연스레 눈이 녹고 꽃이 피고 코트가 재킷으로 바뀌었고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활짝 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봄이 없는 나라에 살다 보니 "'봄'이라는 게 도대체 뭔데?" 정의를 해봐야 친구의 "거긴 어때(거기도 봄이 왔어? 따뜻해졌어?)"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긴 여름 그리고 여름이야."
"여긴 알파 여름?"
"여긴 완전 여름?"
"어떻게 말해야 하지. 여름 중의 여름? 아무튼 봄은 아니야. 그리고 봄이 오진 않을 거 같아. 봄이 없나 봄."
태국에서 4월은 더위가 절정에 달하는 시기이다. 11월경부터 시작된 건기는 아직도 지속되고 있고 한낮에 달군 열기를 한 차례의 비가 식혀주지 않기에 밤에도 체감 기온 34도, 한낮엔 실제 기온 36도에 체감기온이 42도까지도 올라가고 있다. 비가 오던 우기에는 최고기온이 28도-30도 정도였는데 그때도 분명 '여름'이었으니 지금은 여름그리고여름, 알파여름, 완전여름, 여름중의여름이라고 해야 구분이 될 것 같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고 한국의 특징을 배우면서도 속으로 당연한걸 굳이 특징이라고 가르쳐주나 싶었다. 그러면서 다른 데는 사계절이 없어? 4월 되면 영락없는 봄이고, 8월이면 영락없는 여름, 10월이면 영락없는 가을, 12월은 영락없는 겨울이지, 아니면 뭘까.
다 커서 태국이란 나라에 와 살다 보니 그 답을 이제는 할 수 있다. 여름여름여름여름. 계절은 하나다. 대신에 건기, 우기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너무 태국에서 한국인의 방식으로 생각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인들이 나름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나누고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 1년 12개월을 4등분해서 3개월씩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지칭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게 아니라면 이 나라에서는 정녕 봄, 영어로 'spring'이라고 하는 게 정말로 없냐는 거다.
국제학교에서 중학교 과학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는 캔더스(Candace)가 그 의문에 답을 해 줬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계절(Season)'에 대해 가르치는데 '봄(Spring)'을 이해시키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그럼 겨울은? '봄'을 따뜻함으로 서술할 수 있다면 여름도 따뜻한 과로 비슷하지 않은가. 비슷하니까 이해하기도 쉽고. 반면, 추위란 것이 없는 이 나라에서 '추움'으로 서술되는 '겨울(Winter)'을 가르치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
캔더스(Candace)는 '겨울'은 상징적인 '눈(Snow)'이 있기 때문에 설명하기도 쉽고 학생들이 구분하여 이해하기에 상대적으로 쉽다고 했다. 겨울을 눈으로 설명한다면, 봄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봄=벚꽃, 꽃나무, 딸기, 설렘, 따뜻함'이라고 하는 게 이곳 태국 사람들에겐 먹히지가 않을 테니 말이다. 태국에는 12개월 내내 다양한 꽃나무의 꽃이 활짝 편다. '벚꽃'은 내가 사는 방콕에서 아직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찾아보니 치앙마이 도이수텝 인근이 벚꽃으로 유명하다는데 1월이 가장 절정이라고 한다. 그럼 한국과 일본에서의 대표적인 봄의 꽃인 벚꽃이 만개하는 1월을 태국의 봄으로 칠 것인가. 아무래도 꽃이 만개하는 개월마다 계절을 칭하기엔 무리가 있으리라.
그럼 딸기는 어떨까. 한국에서 주로 봄에 먹는 딸기는 '저온단일(낮은 온도에 해가 짧음)'에서 재배되는 품종이고 내내 '고온장일(높은 온도에 해가 김)'인 태국에서는 봄에만 먹는 한국산 품종 딸기는 재배가 되지 않을 것이며, 수입해서 비싸게 먹거나 혹은 고온장일에서도 재배가 되는 다른 품종의 딸기를 기르는 노력은 되고 있다고 한다. 딸기엔 다양한 품종이 있고 태국에선 주로 수입하여 먹으니 '딸기=봄의 과일'이라고 하기가 애매하다. 추웠다가 따뜻해지면서 마음도 온도처럼 풀리며 나타나는 '설렘'의 감정은 벚꽃 딸기보다 더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영어로 설명하든 태국어로 설명하든 한국어로 설명하든 어떻게 설명해도 '봄'에 대해 또렷하게 이해시키기가 어렵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한국에선 봄이 되면 '봄을 타'기도 했다. 조금 설레어하면 '너 봄 타?" 조금 나른해하면 '너 봄 타?' 무언가 그리워서 살짝 울적해해도 '너 봄 타?' 이러지 않는가. 봄을 탄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설명하긴 힘들지만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그에 따라 생기는 기분의 변화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리라.
그럼 봄이 없는 이곳에서는 대표적인 봄의 기분이라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설렘, 나른함, 그리움을 언제 타는 걸까. 한국에서 사계절이 바뀌면 나도 기분이 조금씩 달라지곤 했다. 개인마다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나의 경우엔 겨울이면 약간 움츠러들다가 봄이 되면 피어나는 듯 마음이 열리고, 여름이 되면 사방이 푸르러지듯 마음도 푸릇푸릇해지고, 가을이 되면 가을만의 풍요로움과 경건해지는 기분이 분명 있었다.
겨울이 긴 북유럽 사람들이 우울증이 많다고 하는 연구결과도 있는데 계절의 날씨가 사람들의 기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늘 여름인 동남아의 사람들의 기분은 일 년 내내 푸릇푸릇한 걸까. 늘 에너지 넘치는 긍정적인 기분만이 있는 것일까. 물론 여름이 싫어서 여름 하면 우울한 기분이라고 연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 여름은 그런 계절인 게 확실하다.
아직 일 년을 통째로 살아보지 않아서 사계절의 구분이 없는 이 나라에서 시기, 날씨, 계절에 따라 내 기분과 무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아직 다 관찰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곳으로 이사하고 모든 것이 새로운 첫 해에 새로움이 주는 설렘과 두려움이라는 것이 가장 크게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에 비교조건이 조금 맞지 않은 것 같다.
잘은 모르지만, 봄여름가을겨울이 아닌 우기와건기로 일 년을 나누고 구분하는 이곳의 사람들의 생활방식, 사고방식, 기분의 변화 등은 다를 것임이 분명하다.
이제 나는 '사람이 다 똑같지 뭐, 사는 모양도 비슷하고...'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며 그게 진리인양 믿지도 않는다. 봄이 있는 한국에서 봄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지만 봄이 없는 태국에서 봄에 대해 말하려면 봄이 무엇인가부터 생각해야 하듯이 그곳과 이곳에서는 생각하는 것부터가 다르고, 생각하는 게 다르니 느끼는 기분과 감정, 그리고 생활방식도 당연히 다를 것이다. 내가 접하고 보는 것이 다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서 이 세상은 작은 것 같지만 말도 안 되게 크고 넓고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