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ebangchon Apr 02. 2019

이웃의 고양이, 이웃의 집사

방콕 변두리로부터의 이웃 예찬론

같은 무반(빌리지, 동네를 지칭) 내에 많은 친구이자 남편의 동료들이 살고 있다. 한 동네에서도 한 골목 내에 십 수 명의 친구 이웃이 있다. 슈퍼에 간단한 식료품을 사러 가다가도 만나고, 저녁 먹으러 나가는 길에도 만나고,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도 만나고, 그냥 산책 겸 나갔다가도 전봇대 앞, 누구네 집 앞, 골목 어디 즈음에서 우연하게 친구를 마주친다.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지나가며 "How are you?" 정도만 하고 손 흔들고 지나가기도 하고 걸음을 멈춰 이 얘기 저 얘기 안 할 얘기 없이 다 한다. 어떤 날은 친구 Candace를 만나 이야기하고 있는데 퇴근하고 돌아오던 Mariana가, 마사지받으러 나오던 Jerrid가, 쓰레기 비우러 나오던 Kelsey가 줄줄이 붙어 서서 원래 나오고 들어가던 목적을 잊은 채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한다. 


친한 사람과 한 동네, 한 골목에 사는 것.

바로 이런 거다. 메신저나 전화로 서로의 시간을 확인하고 무엇을 위해 어디에서 만날지 약속을 정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만나 지고 그래서 더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어지는 것. 그래서 누구나 조금씩은 나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알고 들여다보며 사는 것. 




'우리 나중에 같은 동네에 살자', 혹은 '우리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집 지어서 같이 살자'라고 말한 친구가 학창 시절부터 몇은 있을 것이다. 나는 대학시절 절친한 친구 둘과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난 삼청동이 좋아. 이 동네에 모여 살자." "약간 외곽으로 나가서 집을 지어도 좋겠다. 나란히 같이 짓거나 크게 지어서 나눠 사는 거지." "대학 캠퍼스랑 멀지 않은 곳이면 주말마다 같이 산책 나와 추억도 떠올리고 좋을 텐데." 


그런 대화를 주고받을 때에 우리는 마치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때까지 우리의 우정이 변치만 않는다면 가능할 줄 알았다. 대학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해서 각자 돈을 벌 때에도, 이후에 결혼을 해서 부부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때에도 그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서로 수중에 있는 돈의 크기가 달랐고, 직장의 위치가 달랐으며, 그것에 따라 집을 구할 때 염두에 둘 수 있는 지역이 천차만별이었다. 같은 동네는 안 되어도 멀지 않게만 살아도 서로가 참 좋겠다 생각했지만 서울은 생각보다 컸다. 


시티 라이프가 아니라 도시 외곽이나 시골에 살았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시에서 만난 친구들은 각자의 고향이 달랐다. 즉 돌아갈 시골이 있다고 해도 다 달랐을 것이다. 혹은 어떤 거창하고 크고 굳은 결심으로 작정하고 다 같이 시골 살기를 하기로 작정하고 떠나지 않는 한 불가능해 보인다. 




지난 수요일, 한 골목 내에서 서로 간의 집 거리가 약 30m쯤 되는 곳에 사는 제러드(Jerrid)가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이번 주말에 동네에 있어? 만약 그러면 우리 Gatsby(게츠비, 제러드네 고양이) 들여다 봐 줄 수 있어? 와서 물이랑 사료만 하루에 한 번 챙겨주면 되는데." 


게츠비(Gatsby), 미국에서 태국 방콕 변두리로 이사왔어요!

제러드네 부부는 게츠비라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는데, 먼 곳에서 온 친구와 주말에 푸켓을 가는 동안 고양이를 두고 가는 모양이었다. 주말에 다른 계획이 없던 나는 동네에 머물 생각이었고, 당연히 "No Problem"이었다.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제러드 집에 들어가서 게츠비 그릇에 제러드가 미리 챙겨둔 사료를 부어주고, 마실 물을 채워주는 것. 그리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함께 노는 것. 부모님 댁에서 강아지는 키워 봤지만 고양이는 처음이라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함께 노는 것'이 가능할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기본 요청 사항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푸켓 떠나기 전에 만나서 열쇠를 받아야 하나? 라고 생각하던 찰나, 제러드가 말했다. 

"우리 집 열쇠는 현관 왼쪽 옆집 창틀 있잖아. 그 위에 있어." 어릴 때 연립주택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 때 우리도, 보조키를 현관 근처 화분 아래 넣어두곤 했다. 사람이 있을 땐 문을 잠그지도 않고 열어두고 살았던 시절이니 그때도 이웃이 우리의 보조키가 있는 곳을 안들 그것을 다른 곳으로 치울 이유는 딱히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굳이 나갈 이유도 없어서 뱃살만 찌는 느낌이 드는 가운데 '게츠비를 보러 가야'한다는 사명감이 반가웠다. 길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진 않은지 슬쩍슬쩍 보면서 재빠르게 손을 들어 창틀 위의 열쇠를 찾았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갔는데 게츠비는 2층의 제러드 침실에 머문다고 했다. 기척이 없다. (당연하다) 


강아지였으면 벌써 쫓아 나오든지, 방문이 닫혀 있다면 안에서 짖어대고 난리가 나도 났을 텐데, 고양이 게츠비는 조용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도 숨바꼭질 중. 침대 밑에서 웅크리고 나를 주시만 하던 게츠비에게 사료와 물을 주고 가만히 벽에 기대어 방바닥에 앉아 있어 보았다. 우리 집 강아지 부르는 마냥 이름을 불러 보아도 반응이 없고, 손을 까딱해봐도 올리가 없고, 입으로 '냐옹, 냐옹' 해봐도 '저 인간이 왜 고양이 소리를 내지'하는 시선만이 답을 할 뿐이었다. 


'적어도 가까이 와서 내 냄새는 좀 맡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싶었지만 나는 고양이의 마음을 알리 없는 이웃집에 사는 집사일 뿐이었다. 


다음날이 되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게츠비를 보러 가야겠다 싶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게츠비 아침을 챙겨줄 생각에 슬리퍼를 신고 걸음을 재촉했다. 주인 집사도 없는 방에서 혼자 잤는데, 그릇의 사료도 비었다면 얼마나 자기를 두고 간 주인을 속으로 원망할까, 요령이 없는 이웃의 집사를 원망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방문을 열었는데 게츠비가 방문 쪽으로 와서 '야옹' 하고 워킹을 하고 있었다. "오, 이 녀석, 마중 왔구나!" 하는데 돌아 들어가는 도도한 이웃의 고양이. 집사 대접을 안 해준다. 


빈 그릇을 보니 이웃의 집사가 양 대중을 잘 못해서 어제 사료를 너무 적게 준 게 아닌가 괜스레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사료와 물을 채워주고 근처에 앉아 있으니 게츠비가 슬슬 걸어 나와 사료 한번 먹고 나에게 와서 슬며시 비비며 지나간다. 개집사는 해봤어도 냥집사를 안 해본 나여서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고야 말았지만 아는 척을 해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그것이 경계의 의미든 관찰의 의미든 친근의 의미든 간에. 


고양이가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번씩 나의 팔뚝과 다리와 허리에 비비고 가자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이웃의 고양이에게 사료만 제공하는 로봇이 아니라 교류를 하는 이웃으로의 관계가 생겨나고 낯설지만 들여다봐주는 이웃 집사라는 이름이 부여되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나니 눈에 이 방이 들어온다. 개인의 공간 영역에서 가장 개인적인 공간인 침실인 것. 그것도 부부 침실. 큰 주택이어서 1층에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집을 쓰고 있고, 제러드네 부부는 2층의 별도 욕실이 딸린 큰 침실을 쓰고 있었다. 주인도 없는 방에 친구이자 이웃으로 이렇게 역할까지 하나 맡아 들어와 있으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게츠비가 방을 순회하고 나를 치고 지나가는 것을 몇 번 반복하고 다시 침대 아래로 들어가자 나는 잠깐 집에 돌아갔다가 오후에 다시 왔다. 이틀간 세 번을 보게 되자 게츠비도 이제 내가 익숙하고 자기를 해칠 사람이 아닌 것을 아는지 나와서 내 근처에 누웠다. 침대 근처에 앉아 있으면 침대 위에 올라와 내 머리 뒤에 눕기도 했다. 그렇게 게츠비와 잘 놀아주지는 못하지만 함께 있으면서, 제러드에게 '게츠비는 잘 먹고 잘 있으니 걱정 말아라' 하는 의미로 게츠비의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리고 네 번째 갔을 때 게츠비는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내게 와서 엉덩이, 등, 얼굴 등을 내 다리에 대고 누웠다. 겁이 많은 나는 고양이가 익숙지 않고 살짝 겁도 나서 함부로 만지며 놀아주진 못했지만 기대 누운 게츠비의 등을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다 손을 떼면 고개를 들어 보기도 했고 다시 만지면 눈을 스르륵 감기도 하는 것. 


이제 우리 좀 친한건가? 게츠비와 이웃집사

네가 바로 '개냥이'구나. 그렇게 생각할 때쯤 한국에서 고양이를 두 마리 키우고 있는 친구가 메신저를 보냈다. "오 많이 친해졌네. 집사 인정! 근데 주인 오면 끝이야 넌 ㅋㅋㅋ" 


충분히 상상 가능한 찬밥을 면전에서 안 당하기 위해 주인이 오기 전에 집에 돌아왔다. 




대학 시절에나 그 이후에도 쭈욱 상황이 전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친구들을 만나면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모여 살고 싶다고 했던 속뜻은 '더 자주 보고 싶다는 말'이고 '지속적으로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고 싶다는 말'이고 '흔쾌히 큰 부탁과 선심 없이 도움을 요청하고 돕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점점 어른이 되어 가면서 그런 도움이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역설적으로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게도 삶은 나아가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했을 때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 그리고 누군가 내게 큰 부담을 가지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 이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각자 잘 살면 됐어. 살아남아서 만나자'하는 각자도생의 시절에, 방콕 변두리에서 나는 이곳에서 만난 친구 이웃들과 '함께 잘살기'를 하고 있다. 각자 잘 살고 만나도 좋긴 한데 각자 잘 살기가 힘들어서 그렇게 육아 때문에 울고 고향에서 친정 엄마가 친정 아빠와 생이별을 하고 떠나 온다. 친정 아빠와 생이별하고 와 줄 친정 엄마도 없으면 아기를 안고 동동거리면서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눈치를 보며 살기도 한다. 하루에 한 마디도 안 하고 혼잣말을 하는 날이 늘어가면서도 '사람은 본디 외로운 존재다'라며 외로움을 애써 위로하며 살기도 한다. 그래도 외로운 어떤 날엔 친구가 만나고 싶어서 연락을 해보지만 각자 살기 바쁘기는 상대도 마찬가지고 마음이 굴뚝같아도 날잡기, 장소 잡기는 왜 이렇게 힘든지. 그러다 보니 친구나 이웃이 별로 안 중요하게 여겨지게도 됐다. 


이런 시절에 이웃의 쓰임을 당한 것이 너무 기뻤다. 이웃을 쓸 수 있었던 제러드도, 이웃에 사는 다른 집사를 알게 된 게츠비도 모두 기뻤을 것이라 생각한다. 별거 아닌 하루에 기쁨이 생기는 것, 우리가 별로 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이웃이나 친구로부터 가능하다니 의외로 이웃과 친구는 중요하지 않은가. 


이웃의 쓰임을 당하는 즐거움이
일상의 행복이 된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내 영어는 수많은 영어 중 하나일 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