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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ebangchon Aug 19. 2019

오늘도 여행하고 싶습니까

여행병, 여행중독 아닌 이유 있는 여행 <여행의 이유>

"나는 여행 안 좋아하는데."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 이유를 궁금해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이유가 필요한 쪽은 여행을 안 하는 쪽보다 여행을 하는 쪽이다. 여행을 하지 않는 건 보통의 상태이지만 여행을 하는 것은 보통의 상태를 벗어나는 비일상적인 상태이며, 위험을 담보하면서 돈까지 쓰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여행은 불안과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에 가기 전에, 그곳에 대해 미리 알 수 있는 한의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은다. 그곳의 어느 식당이 안전하고 맛있는지까지 우리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미리 찾고 확인하려고 한다. 또한 상해와 사망, 질병 조건을 담보한 여행자보험에 가입한다. 여행이란 분명, 위험한 짓의 하나인 게다. 돈도 들고 위험도 한 이것을 하는 이유가 사람마다 다를 것이면서도 비슷할 것이다.




<여행의 이유>에는 밑줄이 가는 문장이 많은데, 여행을 좋아하면서 왜 좋아하는지 일목요연하게 말하지 못한 우리의 생각을 적어둔 것 같기 때문이다. 늘 그렇지는 않아도 그런 때도 있었지 하면서 작가의 경험과 생각에 동의되는 부분이 많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겠을 때, 혹은 그 이유가 시시때때로 다양하게 너무 많아서 정리가 안 된다면 이 책을 읽으며 '네 맘이 내 맘이야.' 하는 작가와의 혼연일체를 이룰 수도 있겠다.


(61p)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하나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벨맨이 가방을 받아주고 리셉션의 직원은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1)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2) 그런데 받아들여진다. 3)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4) 그러나 곧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특히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작가 김영하가 자신이 여행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어 밝히는 부분이고, 그렇게 '프로그램'화된 까닭까지 유추해 보는 부분이다. 김영하 작가는 좋아하는 여행의 구체적인 지점(호텔을 좋아함) - 여행에서 얻고 싶은 것(삶의 안정감) - 자기 내면의 프로그램 즉, 신념(삶의 안정감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을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창조하듯이 추적해 본다. 거기에 덧붙여 자기에게 그런 것이 프로그램화된 이유를 어려서 전학을 자주 다니면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적응하며 받아들여져야 했던 경험들이 쌓여서인 것 같다고.


(109p)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현재를 즐기자. 현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택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김영하 작가의 방식에 빗대어 나도 추적을 해 보자면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구체적인 지점(별다른 목표가 필요 없다, 현재에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 여행에서 얻고 싶은 것 (만족감) - 자기 내면의 프로그램, 신념 (삶의 만족감은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것을 매 순간 해낼 때 생겨난다고 믿는다.) 정도로 할 수 있겠다. 나의 경우에, 여행하는 순간에만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 오는 미련과 후회, 걱정과 자신 없음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행을 하는 중에는 눈앞에 닥친 숙소 찾기, 교통편 찾기, 필요물품 구하기, 식사하기, 안전한 곳에서 잠자기 등 당장의 새로움에 적응하고 당장의 안전을 도모하며 필요한 걸 찾아내는 걸로 분주하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그런 당장의 필요한 것들을 해소하고 나면 그 자체로 참 잘한 일이 된다. 뭔갈 더 해내기 위해 추구하지 않아도 괜찮다. 칭찬을 받고,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이 늘 과제의 연속인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여행길에서는 낯선 사람에게 그들의 언어로 '안녕하세요'만 해도 박수받을 일이 되고, 처음 보는 음식을 잘 먹기만 해도 참 장한 일을 해낸 게 된다. 일상에서는 여간해선 탐탁지 않은 자신이 여행지에서는 후하게 탐탁해진다.


(154p) … '아무것도 아닌 자'인 것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달랐다. 젊은 날의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의 인종이나 국적에 따라 ‘특별하게 분류되고, 일단 분류된 이후에는 사실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경험은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여행자는 낯선 존재이며, 그러므로 더 자주, 명백하게 분류되고 기호화된다. 국적, 성별, 피부색, 나이에 따른 스테레오 타입이 정체성을 대체한다. 즉, 특별한 존재 somebody가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 nobody일 뿐이다.


(174p)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많은 타자들 사이에서 내가 '나'로 정확하게 읽히기를,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갖추기를 바란다. 동시에 그래서 우리 삶이 늘 과제의 연속이고 성취의 여부에 행복이 달린다. 여행은 나를 '이런 걸 바라는 나, 그것을 거둔 나, 저것을 실패한 나, 다시 극복한 나... 다시 무언가를 도모하는 나 등'으로 지칭할 수 없다. 그저 여행 온 낯선 자, '그냥 어떤 이'가 되어 그 자체로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게 여행이다.




(203p) 일상은 파도처럼 밀려온다. 해야 할 일들, 그러나 미뤄두었던 일들이 쌓여간다. 언젠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들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통제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에 시달리곤 한다. 조금씩 어떤 일들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생긴다. 욕실에 물이 샌다거나, 보일러가 낡아서 교체해야 한다거나, 옆집이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가 너무 시끄러워진다거나 하는 일들. 우리는 뭔가를 하거나, 괴로운 일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여행자는 그렇지 않다. 떠나면 그만이다. 잠깐 괴로울 뿐,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다.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하던 일을 관두고 남편 따라 해외에 나와 사는 나에게 간혹 친구들이 묻는다. "너는 따로 여행을 안 가도 해외에 사니까 그 자체로 여행이겠다."라고. 답은 "아니"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동네에 이사 와서 집을 구하고 짐을 넣고, 일상을 꾸려나가면서 그새의 짧은 사이에도 이 공간엔 많은 먼지와 기억과 기분과 일상이 쌓인다. 휴지통이 차면 직접 비워야 하고, 빨래를 하면 개어야 하고, 알람을 놓쳐 이불을 엉망으로 젖혀두고 뛰쳐나가야 하고, 때만 되면 전기세 수도세 고지서가 날아오고, 남편이랑 싸웠던 소파도 그대로 있다. 다만 장기간 한 곳에 쭉 살며 묵은 먼지만큼 쌓여온 과거의 기억들이 한데 엉키지는 않아서 조금 가볍기는 하다. 살아온 땅을 벗어났으니 그만큼 엉킨 것이 없는 건 맞다.


(146p) 이런 환대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언젠가 읽은 여행기에서 나는 답을 발견했다. 저자는 북유럽을 여행하던 중에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그제야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황하는 그녀 대신 현지인 할머니가 버스 요금을 내주었다. 나중에 갚겠다고 하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자기에게 갚을 필요 없다, 나중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에게 갚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요즘엔 관광보다는 '살아보기' 방식의 여행을 많이 한다. 일상을 살며 깨우쳐지지 않는 좋은 것들을, 남의 일상 속으로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여행지에서 흔히 생기는 환대의 순환은 실은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다만 매일매일이다 보니 그것이 무뎌져 퇴색되고, 안 보이다 보니 안 하게 된 것. 그러니 가끔은 일상이 놓여있는 현재 이곳을 여행지처럼 생각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여행지에서의 여행자처럼 일상을 살아보기 위해서,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또 꼬박꼬박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티켓을 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행병이 걸린 것도 아니고 또 여행이 가고 싶다고?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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