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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ebangchon Sep 28. 2020

주인공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법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나이가 이제 적지 않아서 그런지, 혹은 워낙에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삶이어서 인지는 몰라도 점점 가운데보다는 그 주변 것들에 시선이 가게 된다. 영화를 봐도 주연보다 주연의 친구로 나오는 조연, 드라마 회사 씬에서 별 대사 없이 카메라 앵글 내에 겨우 잡힌 엑스트라라든지.  


마블 영화를 보고 다들 영웅 주인공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유독할 말이 없었던 것, 나를 반영할 수 있는 나와 비슷하거나 그래서 마음이 이끌리는 히어로가 없었던 것은 아마 내 상상력이 주인공보다는 오히려 나일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그 외' 인물들에 치우쳤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들이 악당을 무찌르는 중에 빌딩이 무너지고 도로의 차가 날아가 뒤집혀 다시 땅으로 떨어질 때 당을 무찌르는 주인공보다, 빌딩이 무너지고 도로의 차가 날아가 뒤집혀 땅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불시에 털리는 사람들'에 내 상상력이 더욱 많이 할애되는 건 어쩜 너무 당연하다.


p. 6 서문_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주인공 중에서 자신이 누구 같은지 이야기해본 적이 있으신지? 나는 그런 대화를 많이 봤다. 누구는 헐크, 누구는 닥터 스트레인지, 누구는 블랙 위도우, 누구는 그루트.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점심 먹고 차 마시면서 나누기에도 손색없는 화제다.  
나는 그 이야기에 쉽게 따라붙을 수 없었다. 원체 영화를 많이 안 봐서 마블 시리즈를 잘 몰랐다. 게다가 그 영화의 영웅들이 온 도시와 우주를 다니며 세계를 구할 때 내 눈에는 불시에 털리는 사람들만 보였다. <어벤저스>에서는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서 도심의 빌딩을 깨부순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보면 그 건물 안에 있는 사무직 직원을 더 떠올리게 된다. 아니 저렇게 사무실이 무너지면 목숨은 둘째치고 나중에 사무실 정리는 또 어떻게 하나. 시가전 장면 속 거리에는 박살 나고 찌그러진 차들이 가득하다. 그때도 내 차가 저렇게 되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든다. 저런 차들 보험 처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싶고. 분명 보험사에 유리하게 돌아가겠지.


Photo by Esteban Lopez on Unsplash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의 저자 박찬용은 이를 '내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도시를 구해내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 난장판 속에서 죽지 않기 위해 몸 숙이고 열심히 도망가는 '털리는 사람'에 이입하는 사람이 나 하나는 아니란 것에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든다.


저런 상황, 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상황에서 날아오는 아스팔트 맞고 죽을 수도 있는 운명 앞에서도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뭘 챙겨 나가야 할까?" 다 버리고 일단 살기 위해 달리고 보는 게 맞지만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다. 주인공이 악당을 무찌르고 살아남았을 때 환호받을지는 몰라도, 주인공이 아닌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그런 난리부르스가 난 상황에서 일상을 되찾고, 하던 일을 이어가야 한다는 현실이다.


마지막 교정을 보던 프린트된 원고는 가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작성 중이던 내년 사업계획안 초안은 적어도 저장 버튼은 누르고 가야지, 그런데 저장 서버나 장치가 터지기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니 프린트물이라도 해서 가져 나가야 하나? 생존 필수품으로 스마트폰과 렌즈(안경)는 꼭 몸에 지니고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상상 속 짐이 늘어만 간다.


이런 생각을 하는 그 바탕에는, 난리 후 다시 이어져 갈 일상에서 '빡침'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마음과 동시에 저런 난리 속에서도 살아날 자신감은 있구나, 내가 그렇게 지지리 운 없는 인간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도 서려 있다.


p.46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뭔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 꼭 열정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냥 내 일은 눈앞에 떨어져 있고 그 일에는 마감 날짜라는 태그가 달려 있다. 나는 원고 마감이라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작게는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고생하고 크게는 그 원고가 실릴 잡지나 책이 늦게 나간다. 안 될 일이지. 책 만들기는 누군가의 사업이다. 남의 사업을 방해할 순 없다.


어쩌면 저자 박찬용이 말하듯, '주인공이 아니라도 열심히 사는 삶을 살고 싶은' 소시민이자 평직원으로서의 착실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열정도 욕심도 없지만 주어진 일 앞에서 적어도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해서, 내 몫은 해낸다는 최소한의 내 만족을 위해서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가 아닌, '다행히도 열심히 살았다.'의 자세로 오늘을 살아가는...


p.11
말하자면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도 열심히 사는 삶을 살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 건 안다. 내 삶이 뭘 하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포르쉐의 신형 911 발표회 같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그러면 어때. 내 일을 잘 해냈을 때의 외적 보상과 내적 만족이 있다. 일이 궤도에 올랐을 때 잠깐씩 느껴지는 즐거움도 있다. 더 나아가 직업의 특성상 내 일을 잘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거나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도 있다. 이거면 된 거 아닌가. 이 도시의 핫 100에서 내가 몇 위인지는 내게 큰 상관이 없다.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주인공에 가까운 자리에 왔구나' 착각한 때가 있었으며, 종국에는 '내가 주인공이 절대 아니구나'로 좌절하면서도 '어차피 주인공만 있는 세상은 없다'고 위로하며 나를 받아들이는 주인공이 아닌 우리들. 이제 주인공이고 아니고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받아들였지만 가끔씩은 좌절하기도 하는 우리들.


p.109 산란한 마음이 유행병처럼 들어도
세상은 수시로 가득한 대입 전형 같은 게 되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해서 보통 이상의 정보력이 없으면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 흐름을 못 따라잡으면 놀랄 만큼 뒤처진다. SNS라는 자아 쇼케이스는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에 계속 떠서 눈앞을 맴돈다. 끊임없이 새로고침 되는 SNS 피드 어디에도 남보다 앞서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다. 나의 도태와 패배를 암시하며 광고를 해보라고 부추길 뿐이다.
나는 내가 뭐가 될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안다. 분명 언젠가는 시대에 뒤처질 것이다. 내가 잘 못 쓰는 신규 서비스가 분명 나올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나는 모바일 뱅킹 앱을 안 쓰니까 모바일 이코노미에 뒤처지고 있다. 어도비의 툴들을 못 쓰니까 이미지의 시대에 뒤처지고 있으며 프리미어를 할 줄 모르니까 비디오 시대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링크드인에 가입하지 않았으니 글로벌 인재망에도 들어 있지 않으며 유튜브를 하지 않으니까 콘텐츠의 은하계에는 닿지도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 많은 주인공들이 이끌어가는 세상과 기술의 변화에 부지런히 따라가며 살긴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최근에 그런 경험을 톡톡히 했고, 위기일수록 새로운 세상과 기술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몸소 알게 된 기회가 있었다.


2020 코로나 시국에서 한국에 갔다가 태국으로 돌아올 때(나는 현재 태국 거주 중), 비자 및 워크 퍼밋이 있는 외국인 등 제한된 외국인을 대상으로 태국 입국 문이 열렸다. 이 과정에서 나는 태국 대사관에 세 차례 방문하면서 태국 정부가 요청한 절차에 응해야 했었는데, 태국 대사관에서 그 중요한 정보를 태국 대사관 페이스북 홈페이지에 태국어나 영어로 올려두고, 대사관에 붙은 벽보에는 큐알 코드를 읽고 입국 허가 신청을 예약하는 링크로 가도록 안내하고 있었다.


페이스북이 뭔지도 모르고, 알더라도 계정도 없으며, 구글 번역기를 쉽게 쓸 줄 모르고, 큐알코드 읽는 방법을 모르는 채로 카톡만 되면 만사인 방식으로 스마트폰을 쓰고 있으면 곤란하다는 거다. 실제로 입국 절차를 묻기 위해서 대사관으로 직접 온 사람들이 벽보 앞에서도 이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하는 거야, 폰은 있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당황해 하는 걸 눈앞에서 직접 보니 매일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기술이 가미된 앱들에 관심을 가지고, 쓰지는 않더라도 쓸 줄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미래가 거기에 달린 게 아닌가 하는.


Photo by Famous Artist Painter Ortega Maila on Unsplash


선사시대 불 피우기만큼이나 중요한 생존 필수 기술은 새로운 기술과 변화에 빨리빨리 익숙해지는 것. 세상의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세상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는 알아야 조연의 몫도 할 수 있고, 살아남는 적합한 도구도 만질 줄 알아야 살아남기(생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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