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p. 6 서문_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주인공 중에서 자신이 누구 같은지 이야기해본 적이 있으신지? 나는 그런 대화를 많이 봤다. 누구는 헐크, 누구는 닥터 스트레인지, 누구는 블랙 위도우, 누구는 그루트.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점심 먹고 차 마시면서 나누기에도 손색없는 화제다.
나는 그 이야기에 쉽게 따라붙을 수 없었다. 원체 영화를 많이 안 봐서 마블 시리즈를 잘 몰랐다. 게다가 그 영화의 영웅들이 온 도시와 우주를 다니며 세계를 구할 때 내 눈에는 불시에 털리는 사람들만 보였다. <어벤저스>에서는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서 도심의 빌딩을 깨부순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보면 그 건물 안에 있는 사무직 직원을 더 떠올리게 된다. 아니 저렇게 사무실이 무너지면 목숨은 둘째치고 나중에 사무실 정리는 또 어떻게 하나. 시가전 장면 속 거리에는 박살 나고 찌그러진 차들이 가득하다. 그때도 내 차가 저렇게 되면 어쩌지 싶은 생각이 든다. 저런 차들 보험 처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싶고. 분명 보험사에 유리하게 돌아가겠지.
p.46 해야 할 일을 합니다. 뭔가를 열심히 하기 위해서 꼭 열정이 필요한 건 아니다. 그냥 내 일은 눈앞에 떨어져 있고 그 일에는 마감 날짜라는 태그가 달려 있다. 나는 원고 마감이라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작게는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고생하고 크게는 그 원고가 실릴 잡지나 책이 늦게 나간다. 안 될 일이지. 책 만들기는 누군가의 사업이다. 남의 사업을 방해할 순 없다.
p.11
말하자면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도 열심히 사는 삶을 살고 싶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 건 안다. 내 삶이 뭘 하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포르쉐의 신형 911 발표회 같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그러면 어때. 내 일을 잘 해냈을 때의 외적 보상과 내적 만족이 있다. 일이 궤도에 올랐을 때 잠깐씩 느껴지는 즐거움도 있다. 더 나아가 직업의 특성상 내 일을 잘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거나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 수도 있다. 이거면 된 거 아닌가. 이 도시의 핫 100에서 내가 몇 위인지는 내게 큰 상관이 없다.
p.109 산란한 마음이 유행병처럼 들어도
세상은 수시로 가득한 대입 전형 같은 게 되었다. 모든 게 너무 빨리 변해서 보통 이상의 정보력이 없으면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 흐름을 못 따라잡으면 놀랄 만큼 뒤처진다. SNS라는 자아 쇼케이스는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에 계속 떠서 눈앞을 맴돈다. 끊임없이 새로고침 되는 SNS 피드 어디에도 남보다 앞서는 방법은 나와 있지 않다. 나의 도태와 패배를 암시하며 광고를 해보라고 부추길 뿐이다.
나는 내가 뭐가 될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안다. 분명 언젠가는 시대에 뒤처질 것이다. 내가 잘 못 쓰는 신규 서비스가 분명 나올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나는 모바일 뱅킹 앱을 안 쓰니까 모바일 이코노미에 뒤처지고 있다. 어도비의 툴들을 못 쓰니까 이미지의 시대에 뒤처지고 있으며 프리미어를 할 줄 모르니까 비디오 시대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링크드인에 가입하지 않았으니 글로벌 인재망에도 들어 있지 않으며 유튜브를 하지 않으니까 콘텐츠의 은하계에는 닿지도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