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서 무직자 & 주부가 된다는 것의 민낯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려면, 직장인이 가지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1980년대생 모두가, 그리고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는 와중에 직장인이 되었다는 것은 드디어 취업뽀개기를 했다는 것이고, 엄마 아빠가 "우리 아이 취직했어요."라고 말할 정도는 되게 하는 효도를 하는 것이고, 스스로 생활비를 벌 수 있다는 의미이고, 친구들을 만나 커피 한 잔 사면서 한편에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고, 특별한 기념일에 기분을 내기 위한 소비 정도는 해도 된다는 소소한 기쁨을 가지는 일이다.
또한,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게 되는 일이며 그 조직 내에서 직급이나 직책으로 불리는 내 위치가 생긴다는 의미다. 그리고 은행이나 기관의 요구에 '재직증명서'를 제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며, 이 증명서를 통해 결국 내 신용으로 카드 개설 및 대출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기업에 다닐 경우에는 출입카드를 목에 메고 그 건물을 나오기만 해도, 카드 영업자들이 수수료 무료에 각종 혜택을 주며 카드를 만들어주려고 안달이니 증명서도 필요 없이 나는 회사를 등에 업고 어느 정도의 신용을 가지게 되는 셈이기도 한 것.
우리가 겪었던 그 취업뽀개기는 대학까지 졸업을 했으면 응당 사회에 나와 니 값어치를 보이라는 명령을 수행하며 내 존재의 의미를 증명하는 중요한 관문이기도 했다. 그 관문을 넘어서면서 가지게 된 내 존재의 가치,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출, 마이너스통장, 신용카드 개설 등은 자연스레 직장인이 할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처럼 수행된다. 내가 직장인이어서 얻는 의미들을 순간순간 떠올리거나 활용하지 못하면 조직 내에서 마주하는 몰상식, 권위주의, 비효율 등을 버틸 힘이 직장인에게 없는 것도 맞다.
나는 미국인 남편과 결혼했다. 그리고 미국인 남편은 결혼 3년 차쯤이 되어 갈 때, 태국 방콕의 국제학교로 일터를 옮겼다. 나는 중소기업, 스타트업을 거쳐 당시엔 대기업의 사업부 과장이었다. 버티던 직장인인 나는 당연히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현재는 무직. 그것도 무직 이방인. 결혼을 해 남편이 있으니 '주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회사 후배들로부터 "과장님은 우리의 로망이에요. 부러워요."소리를 들으며 퇴사를 했다. 회사 상사들에겐 "커리어를 포기하고 남편을 따라가다니 실망이군"이란 소리를 들을까 생각했으나 막상 이직이 아닌 퇴사, 해외이사라고 하니 "부럽다. 좋겠다. 잘했다." 소리를 들었다. 결국 그들도 힘든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거였다.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도 별 차이를 못 느꼈다. 나에겐 '해외이사를 잘해 내야' 한다는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할 과업이 매일매일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이달 매출 달성'의 목표 아래 '상품 소싱, 마케팅 확대' 등의 과업을 매일매일 해나갔듯이.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없던 마이너스 통장도 개설하고, 신용카드도 하나 더 만들었다. 기준이 엄격해져서 '재직 상태가 아니면 은행 가는 것이 굴욕'이라던 친구의 따끔한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사 처리일 전의 나는 대기업 다니는 과장의 타이틀로 은행과 카드사 업무를 봤기에 전혀 힘듦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 다닐 때의 '쥐꼬리 만한 월급'은 퇴사 후 쥐꼬리보다 훨씬 크게 느껴진다.
직장인이 아니어도 바빴고, 목표와 과업이 있었고, 퇴직금이 있었고, 아직 덜 정산받은 월급도 있었다. 과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점은 오히려 좋았다. 회사에서 제발 나 좀 부르질 말길 얼마나 바랐던가. "우 과장, 이번 달 예상 매출 얼마나 돼?" "우 과장, 현재 누적 매출 상황은 어때?" "과장님, 서비스 오류 나요." "과장님, 미팅 끝나고 회의실로 오세요. 주간 회의 갑자기 한대요." 확인, 지시, 소환, 호통 등을 위해 나를 불러대지 않으니 내가 하는 과업을 더욱 집중적으로 해 낼 수도 있었다.
인천에서 방콕으로 약 5시간 30분. 직장의 범위가 아니라 사는 나라의 범위를 바뀌니 직장인이고 아니고는 더 상관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직장인이 아니라는 것을 정작 깨닫게 하는 순간이 비행기 안에서 있었다. 입국신고서를 받아 작성하는데 멈칫한 순간이 있었으니, 직업(occupation) 칸이었다. 남편이 쓴 것을 슬쩍 보니 "Teacher"라고 쓰여 있다. 다른 모든 칸을 다 쓰고도 빈칸으로 놔둔 나는 내 직업이 뭔가 직시하게 됐다.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았다. 짧은 영어로 입국 심사대에서 곤란을 겪지 않으려면.
처음에 떠오른 건 "No Job"이었다. 전문직이 아니고서야 회사원은 잡(Job)을 가진 상태이고 회사원이 아닌 것은 무직(No Job)인 게 아닌가. Job을 가지는 것이 꿈이었던 힘든 20대를 지나 나는 아직도 그 단계에서 한치도 발전하지 못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이 난 건 "Housewife(주부)"였다. 살림을 제대로 해 본 적도 없고(경력 0년), 살림에 대한 노하우나 지혜도 획득하지 못한 나이지만, 어차피 입국 심사대에서 내 살림 경력과 노하우를 시험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결국 "Housewife"라고 썼다.
그 이후에도 나는 입국신고서를 쓸 때마다 여전히 당혹스럽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전까지 "백수"였던 상태에서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 자괴감 등이 십 년이 지나서도 고스란히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내가 극복해야 할 과거라는 게 이렇게 존재를 드러냈다. 동시에 빨리 주부로서의 전문성이랄까, 그만한 살림 노하우와 지혜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상에서 스멀스멀 자존감이 떨어지고 우울해질 때면 "아기라도 낳아야 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기 낳아 기르는 게 쉽고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기를 돌보는 엄마의 고된 노동은 그 누구도 인정해주는 가치 있는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내 강박 때문에 계획에 없던 아기를 낳을 수는 없다.
Housewife 외에 Homemaker라는 용어를 찾았다. Housewife 보다는 가사 살림(Homemaking)의 가치를 보탠 용어로 이해된다. 직장을 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이 그냥 놀고먹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생산하는(making)하는 일임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느껴졌다. 직장을 가지 않는 것이 무능력이고 비생산적이고 가치 없음이라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서른다섯 살의 한국인인 내게 위안이 되었다.
A homemaker is a person whose main job is to take care of his or her own family home and children. -위키피디아
그래서 나는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 대학시절, 백수 시절, 직장인 시절 내내 소홀했던 '아침식사'를 챙기기 시작했다.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식사와 위염, 위궤양 진단에서 늘 자유롭지 않았던 나의 아침식사에 신경을 많이 쓴다. 또한 회사에서 체력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탈탈 털려 주말마저 침대 보전하던 나를 회상하며 체력 기르기 위한 스트레칭 및 조깅을 한다. 야근하느라 생략하거나 컴퓨터 앞에서 김밥 한 줄 대충 먹거나, 레토르트 식품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던 저녁 대신 매일 저녁 무엇을 사 먹을까 혹은 해 먹을까 생각하며 먹는 다양성과 재미를 꼬박꼬박 챙기고 있다. 그렇게 우리 가정이 건강해지게 하는 일, 그게 지금 나의 주된 일이다. 그리고 주된 일 옆으로 블로그에 여행기 쓰기, 다음 여행 계획하기, 브런치에 내 일상 쓰기, 영어 공부하기, 태국어 배우기, 온라인 사업 서비스 구상하기 등을 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직장인에서
'Homemaker'가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