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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ebangchon Feb 28. 2020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식탁

잡다한 살림살이 없는, 온전히 쓸 수 있는 식탁이 주는 여유

*Photo by Jean-Philippe Delberghe on Unsplash


식탁은 늘 부엌 선반장에 다 들어가지 못한 부엌에서 쓰는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테이블이었다. 적어도 삼분의 일을 그런 잡다구리에 자리를 내어주고 나면 4인 식탁에 4명의 가족이 다 앉기란 불가능했다. 좁은 식탁의 좁은 삼분의 일에 잡다구리들을 효율적으로 안정적으로 쌓기 위해 식탁 한쪽은 늘 벽에 붙어 있었다. 그래야 많은 물건들을 벽에 기대 쌓거나 마음껏 둘 수 있었다. 


살림은 어렵지 않았는데 가족이 많았던 어린 시절, 집이 힘들어 부엌이라는 공간도 작고 식탁도 작았던 시절, 거실과 부엌을 공유하는 13평의 서울 신혼집에서의 우리 집 식탁은 늘 그랬다. 편하게 오손도손 앉아 제대로 밥을 차려 먹기는 좀 곤란하고 힘든 2분의 3의 식탁. 


그래서 나는 온전히 쓸 수 있는 지금의 4인 식탁을 좋아한다. 제대로 앉아서 쓸 수 없었던 식탁을 지금에서야 마음껏 쓰고 있다. 


잡다한 살림살이에 자리를 뺏기지 않은 온전한 내 식탁


직사각형의 식탁에서 아침이 주로 시작된다. 바쁜 생활 속에서 가장 용이하게 함부로 빼먹어지는 시간이 아침을 먹는 시간이지만 여유가 있는 주말이나 공휴일엔 몇 시에 일어나든 식탁에 아침 식사를 차린다. 일찍 일어난 7시든 늦잠을 잔 10시든, 해가 정수리 위에 뜬 대낮이든 잠에 깨어 하루를 시작할 때는 일단 식탁 앞으로 간다. 


보통 쉬는 날이면 나보다 일찍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침실을 나간 남편은 마치 그렇게 세팅된 로봇이 자기 일을 수행하듯 식탁에 앉아서 커피 원두를 간다. 원두를 갈고 물을 끓이고,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을 때쯤엔 나도 더는 못 견디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탁 앞으로 조용히 수렴된다. 


성격이 엄청 급한 나는 식탁 앞에 오면 그 속도를 늦춘다. 

식탁 위에서 커피콩을 갈고 핸드드립을 내리는 시간

식탁 위에서 찻잎이 우러나길 기다리는 시간

식탁 위에 내가 먹을 것들을 차리는 시간 

식기들을 한쪽으로 밀어 두고 다른 레시피를 검색해 보는 시간

찻잔과 비스킷을 꺼내고 책을 열어 보는 시간


식탁 위에선 속도를 늦추게 된다. 


그 시간들은 놀랍게도 잔 살림들이 가득 놓이지 않은, 오롯한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즐기고 쉬어가는 테이블로 역할해 주는 식탁이 만들어 준 시간이다. 


이 식탁에 올라오는 것은 온전히 내가 좋아하는 것뿐이다. 상시로 놓여있는 살림이라곤 고작 커피빈을 가는 수동 핸드밀 정도다. 그것도 내가 즐기는 핸드드립 커피를 위한 것이다. 24시간 365일 죽치고 '이곳은 내게 배정된 자리요'하고 가구처럼 들어차 앉아 있는 살림이 없는 것은 중요하다. 식탁을 애정 따위 개입할 틈 없이 그저 부엌 내 있어야 할 무언가에 내주거나 나눠 쓰지 않고, 온전히 내 시간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확보하기 위함이다. 내 시간을 맘껏 누리기 위해서는 늘 준비되어 있고 비어 있는 '적절한 공간'은 필수다. 


거실을 카페처럼 꾸미는 유행도 잡다한 살림살이가 놓이지 않은 온전한 식탁을 확보한 나의 이유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공간에서 반경 1미터 이내 언제든 손 뻗으면 닿을 수 있고 굳이 시선을 주지 않아도 자동으로 시야 안에서 잡히는 잡다한 살림살이 없이 꾸미는 것이 '카페처럼 꾸민 우리 집'의 핵심 아닌가. 카페처럼 꾸민 우린 집에는 내 눈에 띄는 순간 정리해야 하거나 씻어야 하거나 바르게 해야 하거나 하는 살림살이이자 잔일감이 없어야 한다. 


패션푸르트청을 담는 작업대가 되기도 하고, 시연하는 시연대가 되기도 하는 내 식탁


오늘은 그곳에서 커피를 갈아 내리고, 책을 읽다가 괜스레 스케치북을 가져와 책 안에서 발견한 마음에 드는 삽화 한 꼭지를 따라 스케치를 끄적여 본다. 


집에 놀러 온 친구도 식탁으로 소환. 아침을 2시간에 걸쳐 먹으면서 책도 보고 소감을 나누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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