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하의로 레깅스 하나만 입고 외출하려다가 부모님께 저지당한 한 동료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한다. 레깅스만 입고 외출하는 게 그렇게 이상하냐며 나와 다른 팀원들의 생각을 묻는 그는 자기편을 들어주길 바란다기보다 성숙한 사회 성원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정말로 궁금해 보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전원 여성이었지만 '레깅스가 뭐 어떠냐'부터 '난 조금 민망해서 긴 상의를 입는다' '당당하게 입고 싶지만 사람들 시선이 느껴진다' 등 각기 다른 의견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그 동료가 '민망하게 그게 뭐냐'라며 한 소리 하시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레깅스 바람으로 외출을 강행했었는지 아니면 뜻을 꺾었었는지 결과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대화 이후 내 머릿속에 남은 건 그때 들었던 이야기가 아닌 내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이었다.
결국 레깅스만 입고 외출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으려면 내 판단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거야?
레깅스가 엄연히 속옷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운동 중이 아닐 때 레깅스를 착용하는 것은 좀처럼 적절한 의복으로 인정 해 주지 않는다. 그건 외출복이 아니라 운동복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몸에 차려야 할 것을 차리지 않고 나서는 차림을 이를 때 쓰는 의존명사 '-바람'이 뒤에 똑같이 붙는 '츄리닝'은 TPO에 맞지 않는다는 힐난을 받을지언정 거기에 '민망하다'라는 이유가 따라붙지는 않는다.
입는 사람에게서나 보는 사람에게서나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표현. 우리는 대체 뭐가 그렇게 민망한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당당하게 레깅스 입을 '용기'를 북돋워주는 운동복 업체들의 광고나 홍보문구, 그리고 비슷한 제품들을 비교하는 리뷰어들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주요 레깅스 브랜드와 연관 검색어가 되어버린 단어 ‘Y존'이 문제였던 것이다.
Y존, 양쪽 사타구니에서부터 다리 사이로 떨어지는 몸의 라인을 말하며 그 라인 안에 성기가 포함되기 때문에 여성의 외음부를 포함한 그 주변 청결을 유지하는 것을 ‘Y존 케어'라고도 하지만 이것들을 알파벳 이외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상스럽거나 민망한 일이 되는 상황을 많이 봐 왔다.
한 벌도 없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벌만 있는 사람은 없다고도 하는 레깅스는 요가나 필라테스, 러닝이나 각종 수상스포츠를 할 때도 두루 입을 정도로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기능성 의복이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SNS 피드에도 관련 광고가 자주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홍보 문구는 편안한 착용감, 탄성 있는 몸매 보정력 등에 더불어 봉제선이 없다거나 Y존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멘트를 포함하고 있다.
각종 포털에서 레깅스 선택에 조언을 구하는 질문들 역시 Y존 부각이 덜 되는 제품을 묻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이와 함께 팬티라인, 드물게는 도끼 자국 또한 인기 연관 검색어에 속한다. 원래 그렇게 생겼을 뿐인 여성의 몸은 언제부터 이렇게 드러나서는 안 되는 수치스러운 것이 되었을까.
그 심리를 좀 들여다보고 싶어서 내가 레깅스만 입고 밖에 나갔던 일이 언제 있었나부터 곰곰이 짚어보다가 오로지 해외에 있을 때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나라에서 슬세권(집에서부터 슬리퍼만 신고 도달할 수 있는 반경 내를 일컫는 말) 너머로 레깅스만 입고 나가는 건 용기가 많이 필요한 일이지만 구태여 용기를 낼 생각 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레깅스 바람’으로 나갔을 때 너무 분명하게 느껴지는, 아래로 향하는 그 시선들이 너무 불쾌하고, 그와 싸우면서 내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라는 데 가깝다.
지금은 ‘시선 강간’이라는 표현으로도 많이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 남성들이 평균적으로 보여주는 ‘시선의 사회성’ 수준은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현저히 낮다. 이것은 상체가 발달한 소양인 여성으로서 삼십 년 넘게 살면서 검증한 사실이다. 몸에 맞는 상의를 입었을 때 가슴으로 꽂히는 시선을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기분이 나빠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지 오래인데도, 노골적으로 시선을 고정한다던가 적반하장으로 내 옷차림에 문제가 있다는 투의 시선을 준다던가 할 때는 정말이지 저 상태로 사회생활이 가능한가 의심이 든다. 이런 경험에서 학습된 불쾌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머릿속에서 몇 단계의 사고단계를 빠르게 거쳐 레깅스만 입고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자연스럽게 선택했던 것은.
하지만 여성의 상체에 주어지는 시선보다 하체에 가해지는 그것은 더 차별적이고 억압적이다. 가슴이야 백 번 천 번 양보해 포유류가 엄마의 가슴에 느끼는 본능적 끌림과 자기들에게 없는 것을 신기해하는 마음이 합해졌다고 치자.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 같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가정해 보자. 딱 붙는 하의가 드러내는 몸의 굴곡이라든가 성기의 모양은 오히려 남자의 경우가 더 두드러지는 게 당연한데도, 그런 점을 민망하다든가 평평하게 보이도록 애쓰라든가 하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남성들의 신체구조상 바지를 입었을 때 숨길 수 없는 굴곡이 있지만 여성들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시선을 그 지점에 꽂을 일이 거의 없다. 남성 성기의 두드러진 형태에 민망함이란 표현이 붙을 때는 쫄쫄이 입은 남성이 나오는 개그 코너처럼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상황일 때뿐이다. 반면 여자의 경우는 어떤가. H라인 스커트를 입고 팬티라인이라도 살짝 드러났다가는 있어서는 안 될 실수라도 범한 것처럼 남녀 할 것 없이 한 마디씩 하곤 한다. 농담처럼 했다가는 오히려 성추행이 되는 말이니까 아주 심각하고 은밀하게 넌지시 일러준다.
‘왜 여자는 맘 편히 레깅스를 입을 수 없는가’에서 시작한 질문은 ‘왜 여성의 성기는 남성의 것에 비해 터부시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 되었다. 거대한 페미니즘 담론까지 끌어들이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검색창에 ‘남성’이라는 단어와 ‘자신감’이라는 단어를 함께 입력하면 한 페이지 가득 나오는 성기 확대에 대한 광고와 고민들, 길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어린 아들을 노상 방뇨시키는 엄마들, 공중파에서도 거리낌 없는 남성 성기에 대한 은유적 농담들이 은연중에 남자들의 상징은 언제나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것이라는 의식을 고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왜 우리는 여성의 성기에는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지 않은지, 이게 부당한 것은 아닌지 한 번 멈춰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결국 여성들이 레깅스를 입는 것을 선정적이고 눈 둘 데 없을 정도로 민망한 일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태초에 여성의 몸을 그렇게 자극적으로 만드신 창조주의 탓인가? 아니면 바지에 무릎 튀어나오듯 자연스레 드러난 Y존을 보고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불평등한 사회적 규범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탓인가. 왜 같은 성기인데 내 것은 수치스럽고 비밀스러운 것이 되고 네 것은 아무렇지 않거나 자랑스러운 것이 되는가. 답은 이미 나와있는 것 같지만 나는 앞으로도 레깅스만 입은 채 외출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레깅스 투사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지만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비장한 각오 없이도 레깅스 바람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성들의 자유로운 레깅스 차림은 지난 역사가 보여준 것처럼 패션의 진보를 넘어선 사회 진보의 지표가 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