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엄마는 엄마보다, 아내보다, 자매나 친구나 딸보다 사모로서 살았거든요
사람들은 우리 엄마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아줌마, 주부님, 어머님, 여사님, 결혼한 여성을 특정하는 보편적인 호칭은 많지만 엄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사모님이었고, 엄마의 인간관계 중 대부분은 사모님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명품가방을 들고 강남에 부동산을 보러 다니는 그런 종류의 사모님은 아니다. 신학생이었던 아빠와 결혼했을 당시 엄마가 얼마나 예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가 살아온 목회자 사모로서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독 혹독한 분 밑에서 배웠던 아빠 덕분에 엄마는 도제식 훈련 같은 삶을 함께 살아냈고, 내조가 의무이자 소명처럼 주어진 것이었기에 아빠는 결코 몰랐을 어려움도 겪었다. 각각 다섯 살 일곱 살인 두 딸을 데리고 지금의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의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다. 물론 우리 아빠의 까다로운 성격으로 인한 고생은 별개다. 지금 시대의 감수성으로는 충분히 커뮤니티 게시판 베스트 글이 될만한 일이 많았는데도 언제나 재미있는 추억처럼 웃으며 얘기하는 엄마를 볼 때면 가끔 슬퍼지기도 했다. 철저하게 남편에게 종속된 이 호칭 외에 자신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괜찮은 걸까. 훨씬 밝고 활달했던 엄마의 성격이 이 호칭 때문에 오랫동안 눌려온 게 아니었을까. 요새는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우리 회사 직원 중에서도, 내 친구들 중에도 남편이 목사님, 전도사님 혹은 신학생인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한테 그런 식의 질문을 해 본 적은 없다. 엄마는 마치 날 때부터 사모님으로 태어난 사람 같았고, 사실 내가 태어나서 본 엄마는 한순간도 사모님이 아닌 적이 없었으니까. 다만 우리 엄마가 아니었던 시절, 사모님도 아니고 그냥 이필숙 씨였던 시절의 엄마와 이필숙 사모님은 다른 점이 많은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물론 엄마가 고생만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소명자의 기쁨이라 하든, 고생 끝의 낙이라 하든 뭐든지 간에 이 어려운 길을 택한 엄마에게도 때때로 많은 위로가 있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람은 가장 큰 근심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큰 복이었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모가 되기 위해 가족과도 멀리 떨어져 지내야 했고 가까운 친구도 없었던 엄마에게는 엄마를 사모님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결국 친구였고, 형제자매이자 아들딸이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팠던 몇 년간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언니가 직장 때문에, 해외에 있어서 등의 이유를 댈 수 있었던 건 정말 급할 때 엄마와 같이 병원에 가 줄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한 번 휴가를 내고 내가 병원에 동행하는 날에는 데이트한답시고 병원 인근 걷기 좋은 코스를 돌아다녔지만, 사실 운전해서 엄마를 병원까지 편하게 모시는 건 십 년 된 장롱면허를 가진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출장 다녀왔더니 엄마가 입원해 있다는 건 그 사이에 누군가가 엄마를 위해 줄을 서고 수속을 하고 엄청난 애를 썼다는 말이었다.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의사의 말로 직접 들었던 것은 딱 한 번뿐, 나는 언제나 엄마나 아빠, 누군가의 정리된 말로만 상황을 업데이트받았다. 나는 줄곧 우리 엄마 간병하는데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묘하게 서운한 느낌을 받았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이 내 몫이었다면, 나는 지금 엄마의 투병생활을 떠올리는 게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객관적으로 말하면, 내 고생의 몫은 너무나 작아서 감히 엄마 간병에 지친다는 말 조차 성립이 안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모든 빚을 엄마를 사모님으로 불렀던 사람들에 졌다. 절대로 잊지 못할 만큼. 엄마를 보내는 순간과 그 이후까지도.
떠나기 몇 달 전 엄마는 문득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니 걱정 안 해. 엘림이도 지 가족 있으니까 걱정 안 해. 니 아빠가 걱정이야. 불쌍한 교인들 또 얼마나 달달 볶을지." 아빠 걱정인 듯 하지만 사실은 미묘하게 다른 걱정이었던 것. 이들이 엄마에게도 얼마나 중요하고 또 마지막까지도 걱정되는 존재였는지, 엄마를 설명하는 말이 왜 사모님일 수밖에 없는지, 왜 그걸로 충분한지 확실히 알게 해 주는 말이었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는 사흘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이 빈소를 지켰다. 조문객 중에는 우리 엄마를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엄마를 위해 온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아주 오래전에 잊었던 사람들이나 한 때 엄마를 근심하게 했던 사람들도 얼굴을 비쳤다. 장례라는 것은 그렇게 인생을 결산하는 장과 같이 느껴졌다. 천국의 소망은 우리를 상심이나 절망에서는 구해주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엄마를 이제 볼 수 없다는 슬픔은 참 많은 사람을 울게 했고, 엄마를 위해 많이 기도하고 많이 애써준 사람들의 큰 슬픔이 내 눈에는 보였다. 그분들의 슬픔이 내 슬픔보다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강원도 홍천 산중에 있는 교회 소유의 땅 볕 잘 드는 곳에 엄마를 눕혀놓고 왔다.
장 장로님이 엄마 산소에 풀이 조금 돋아난 사진을 보내주셨다. 운전도 못 하니까 혼자 가지도 못해서, 정작 열심히 가꾸고 일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라는 게 억울했다. 물론 우리 엄마는 천국에 계시니까 거기 있는 건 그냥 상징일 뿐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지만... 엄마의 흔적은 사실 이 집에 훨씬 더 남아있고 아직도 곳곳에 있는 물건들에서 더 엄마가 느껴진다. 그 무덤이야 생전에 우리 엄마가 몇 번 가 보지도 못한 곳. 꽃 심고 가꾼들 엄마가 살아돌아오기라도 하려나. 언니 카톡에 있는 글이 괜히 울컥하다. 천국에는 휴가가 없겠지. 휴가 나오는 게 혹시 꿈에 나타나는 건가. 그렇다면 우리 엄만 천국 간 지 너무 얼마 안 돼서 아직 휴가 나올 짬이 아닌가 보다. 엄마 휴가 때 만나. 내가 그러면 밥 차려줄게. 그리고 올 때는 아픈 몸으로 오지 말고 건강한 몸 가지고 와. 나랑 여행 가서 막 걸어 다니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하고 사진 찍어달라고 하던 그 귀엽고 생기 넘치는 엄마로 와.
2016년 4월 16일
아빠는 한동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엄마 산소를 가꾸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엄마 고향인 가음정이라는 글씨가 쓰인 큰 비석을 세우고, 잔디를 입히고, 주변으로 꽃나무를 심었다. 원래 농작물과 과수를 가꾸느라 일주일에 한 번씩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 간간이 사진을 보내주시는 분도 계셨다. 봄이 오고, 또 사계절이 지나고, 그동안 묘소에는 산돼지가 들기도 하고, 꽃나무를 몰래 파내가는 사람도 있었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드나들며 홍천에 있는 사모님을 돌보고, 추억하고, 그럴 때마다 나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말에도 적절한 대답을 찾기가 어려워서 할 말을 생각하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곤 했다. 나에게는 그 장소가 너무 낯설고, 사람들이 엄마가 거기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이상할 뿐이었다.
아빠 말에 의하면 엄마가 투병 중일 때 같이 홍천에 간 적이 있는데, 아빠가 "우리가 죽으면 여기 묻히자"라고 했더니 엄마가 "햇볕도 잘 들고 위치가 좋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자기가 죽은 뒤 어디에 묻힐지를 심각하게 고민할 사람도 아니었고, 거기 아니라 어디였다고 해도 특별히 싫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본인에게도 그렇게 친숙한 장소는 아니었을 그곳이 좋다고 했다면 그건 매주 사람이 드나드는 걸 감안해서였을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 고생할 일 없이 농사지으러 오고 갈 때 한 번쯤 들여다보기 좋으라고. 엄마의 배려와 논리는 늘 그런 식이었으니까.
서울에서 한 시간 반이면 넉넉히 도착한다고는 하지만 휴일이 있다 해도 홍천은 쉽게 발길이 닿는 곳은 아니었다. 엄마랑 거기 가 본 게 고작 두 번 정도였다. 엄마 없이는 간 적이 없기도 하다. 세 번째 갔을 때 엄마를 묻었고, 약 한 달 후쯤 묘소가 잘 써졌는지 아빠랑 언니네 가족과 함께 가본 것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사 년이 넘는 동안 나는 엄마의 묘소에 다시 가본 적이 없다. 근처에 있는 워터파크에도 간 적 있으니까 일부러 가지 않은 것에 가깝다. 핑계는 차가 없고 운전을 못해서였지만 진짜 이유는 내가 엄마를 거기에 둔 적이 한 번도 없어서이다. 애초에 엄마와의 그 어떤 추억도 의미도 없이 멀기만 한 곳에 엄마를 둬야 하는 건가 했지만, 엄마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기에 거기 두는 것을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다른 집처럼 제사를 지내거나 차례를 지내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아무렴 어때. 어쩌면 무덤이라는 상징물이 없으면 엄마를 쉽게 잊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양보한 것일 수도 있고 나는 그런 게 없어도 엄마를 영원히 잃지 않는다는 자신감일 수도 있다. 어떻게 해석해도 괜찮지만 사실 나도 정확하게 설명이 어렵다. 그저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추운 땅 속에 엄마가 있다는 게 마음으로 잘 와 닿지 않고, 실제로 뼈와 살이 거기 있는 건 맞지만 그게 엄마와 전혀 동일시되지 않는다.
아빠는 ‘엄마 있는 곳’ 이라며 늘 홍천을 말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 차가운 산골짝에 우리 엄마를 둔 적이 없다. 우리 엄마는, 퇴근길 마주친 뻥튀기 트럭에 있고, 주방에서 매일 쓰는 앞치마에도 있고, 안방에 있는 엄마 옷과 가방에도 있으며, 닫힌 방문을 열고 지금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이 집안 곳곳에 가득하게 있다. 만난다고 어디론가 갈 필요가 전혀 없고, 반대로 어디로 간다고 만나지는 것도 결코 아닌데, 사람들은 참 뭐를 잘 몰라.
2018년 2월 20일
초반 일이 년에는 엄마 보러 가지 않겠냐며 청하곤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일절 꺼내지 않는다. 나와 마주치는 어느 누구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그 정도로 심도 있는 이야기 꺼낼 틈을 주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았던, 한동안은 절절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우리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어디에서도 언급하는 일이 없다. 사랑받았던 게 우리 엄마의 존재 그 자체였는지 사모님이라는 직함을 가진 분께 의례히 드리는 섬김이었는지도 이제와서는 헷갈린다.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건 아니다. 원래 사람의 빈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빠르게 채워지는 법이고 이제는 모두에게 그 빈자리가 허전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은 흐른 것 같으니까.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홍천에 계신 사모님의 빈자리이다. 단 하루도 홍천에 있었던 적이 없는 우리 엄마의 존재는 여기 내가 사는 우리 집 모든 것에 아직 있으니까.
장례 직후에 이모들에게 좋은 옷 몇 벌 나눠 주고, 엄마를 가장 그리워할 것 같은 이들에게 추억이 담긴 물건을 몇 개 나눠준 것 외에 엄마의 모든 물건들은 아직 안방 옷장과 행거에 그대로 있다. 평소에 손 댈일 없는 깊숙한 곳을 뒤지다 보물 찾기처럼 엄마의 물건들과 맞닥뜨리는 일은 요새도 종종 있다. 엄마랑 십 년이 넘게 함께 살던 집에서 계속 살고 있는 내게는 공간 속에서 엄마를 발견하고 또 생각하는 건 슬픔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엄마에 대해 말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다. 오히려 내가 두려운 것은 아무도 엄마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우리 엄마의 가장 큰 부분이었을 사모로서의 이필숙을 더 이상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마다, 종종 엄청나게 큰 슬픔이 밀려온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그런 비슷한 내용이 나와서 영화 보다가 사연 있는 사람처럼 서럽게 운 적도 있다.
이번 주에도 누군가는 홍천에 갔을 것이다. 갈 때마다 산꼭대기까지 돌아봐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땅을 오고 가는 사람이 있는 한 엄마 산소가 버려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과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겠지. 그래서 생각해 보면 엄마 산소를 거기 둔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적어도 누군가는 그 무덤을 보면서 여기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할 테니. 아니면 적어도 궁금해할 테니.
사모님은 홍천에 계실지 몰라도 우리 엄마는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엄마는 여기 머물러 있다 해도 사모님은 항상 홍천에 계신 거니까요, 저희 엄마를 잊어버리지 말아 주세요. 왜냐하면, 우리 엄마는 엄마보다, 아내보다, 자매나 친구나 딸보다 사모로서 살았거든요. 그게 잊히면 엄마의 너무 많은 부분이 사라져 버리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를 제발 잊지 말아 주세요. 저도 제가 엄마를 기억하는 한 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애써주셨던 여러분들을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