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것이었던 적은 없지만 엄마가 준 게 틀림없어서
부모상을 치른 지금도 장례 절차나 풍습을 잘 모른다. 잘 몰라서 제 때 어떻게 하지 못했던 게 참 많다. 엄마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어떤 이는 고인의 옷은 태우는 게 풍습이라 했고, 누군가는 엄마 물건이 있으면 자꾸 생각날 테니 어느 정도는 정리하는 게 좋지 않겠냐 했다. 돌아가신 분의 사연과 함께 유품 기증을 하는 사람들을 본 기억이 있어서 그럴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사실 딱히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치워야 할지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건 너무 새것이라서, 어떤 건 너무 오래돼서, 어떤 건 엄마랑 내가 공유하던 거라 내 거 같아서 결국 나는 아무것도 치워버리지 못하고 전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걸 유품이라고 한다면 우리 집은 그야말로 커다란 유품 창고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유품이란 엄마가 평소에 남모르게 간직해오다가 딸에게 건네주는 귀한 물건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명품 패물에 아무 취미 없는 우리 엄마는 가락지 하나도 언니랑 나에게 남긴 것이 없었다. 모든 게 유품이면서도 딱히 유품이라 할 것은 없는 가운데, 엄마 것이었던 적은 없지만 엄마가 준 게 틀림없어서, 유품이라 하기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물건이 하나 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희 엄마는 3년 전 이맘때 돌아가셨고 그전에 2년간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편찮으신 동안 추위를 많이 타셔서 한여름만 빼고 거의 사계절 내내 이 조끼를 입고 계셨습니다. 슬프게 이야기할 마음은 없어요.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들고 온 물건은 아니고요, 이 조끼는 제게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 줍니다.
저는 항상 바쁘게 지내는 편입니다. 그리고 엄마가 편찮으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바빴고, 지금보다 훨씬 더 ‘내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출장을 실제로 많이 가기도 했고, 의식적으로 엄마와 시간을 많이 보내야겠다 생각했던 건 좀 시간이 지나서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엄마가 암 진단을 받을 당시에도 에티오피아 출장 중이었고, 엄마가 아플 때도 무거운 마음으로 해외를 오갔고, 엄마의 마지막을 보지 못할 뻔도 했어요.
(엄마가 계시는 동안의) 마지막 출장을 가기 전에, 저는 열이 나고 몸이 아팠어요. 열이 39도에 가깝게 올라서 집 앞 가정의학과 병원에 입원했었고, 당시 치료 때문에 병원에 있던 엄마가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 ‘가시나 너 그러다 죽어’라고 하시며 출장을 말렸습니다. 평소에 건강체질이고 특히 현장 출장만 가면 펄펄 날아다니는 저라서 이렇게 아팠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저도 너무 힘들기도 했고 맘 같아서는 당장 내일로 다가온 출장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걱정하는 엄마에게 오히려 짜증을 내며 ‘어떻게 출장을 안가!’라고 버럭 하기까지 했습니다. 제 성격은 엄마가 제일 잘 아니까, 엄마도 거기까지였고, 다행히 차도가 좀 있어서 열은 떨어진 상태로 케냐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공항에서 저녁밥을 먹어야 하는 저한테 ‘된장찌개 같은 밥 종류로 먹어라’라는, 확인도 못할 잔소리 같은 걸 하러 카톡을 보낸 엄마는 대화 끝에 갑자기 출장 갔다 오면 후리스(fleeced) 조끼를 새 걸로 하나 사달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만 원도 안 하던데 지금 입고 있는 걸 너무 오래 입었다며, (평소 좋아하는) 곤색은 너무 칙칙하니까 안되고 빨간 걸로 사달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는 엄마에게 저는 알겠다며, 어디서 파는지 모르겠는데 출장 다녀오면 같이 사러 가자고 하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야기를 생략하고, 제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출장에서 다녀온 다음에 엄마는 다시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엄마의 상태가 부쩍 나빠진 걸 보고 걱정하면서도 ‘이제까지 그랬듯 좋았다 나빠졌다 하는 과정이겠지’ 하고 떠났던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제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았습니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도착해서 집에 왔을 때 거실 소파에 앉아 주무시고 있는 엄마를 봤을 때 ‘퇴원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엄마가 누워있기 힘들어서 앉아있는 상태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갔다 와서 보면 되겠지 하고 회사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엄마는 다시 응급실에 갔다고 했고, 바로 따라가려는 나를 말리던 언니도 그게 엄마의 마지막 밤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결국 집에서 밤을 보냈고, 퇴근길에 병원에 들를 생각으로 다음날도 평소처럼 출근을 했지만, 회사에 도착한 지 채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병원에 있는 아빠의 전화를 받았고, 불길한 느낌에 서둘러 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열 시, 엄마는 정확히 사십칠 분에 임종하셨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다 생략하고, 저는 끝내 엄마에게 빨간 후리스 조끼를 새로 사 주지 못했습니다. 당시 출장 가는 길에 사줄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고 해도 어쨌든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겐 시간이 없었던 거였습니다.
단지 이 일 때문만은 아니지만 저는 엄마가 떠난 이후로 더 바쁘게 살게 되었습니다. 분초를 쪼개어 살고, 내일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오늘만 살고, 어떻게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살려고 애쓰게 되었습니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맘을 전하는 일, 그것을 되도록이면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하는 일은 원래 성격이 그렇기도 하지만 보다 확고한 신념에 기반한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별 의미는 없지만 지난 엄마 생일에는 빨갛고 도톰한 후리스를, 이만 원 보다 비싼 걸로 하나 샀습니다. 그 후리스 조끼는 엄마가 입던 것도 아니고 제가 입을 것 같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게 언제나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2019년 3월 20일
2019년 새해를 시작하자마자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소모임을 시작했었다. 정말 즐겁게 마음을 쏟았던 한 분기의 마지막 모임날, 모두에게 주어진 글감은 '내게 소중한 물건'이었고, 나는 주저함 없이 빨간 후리스 조끼에 대한 글을 썼다. 나름 담담한 느낌으로 공유한 건데 낭독을 마치고 나니 몇몇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그리 보편적인 경험은 아닌데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싶었다. 곧 이 이야기는 수만 팔로어를 가진 그 소모임의 SNS 콘텐츠로 제작되어 내가 이전에 받아보지 못한 주목을 받았다. 엄마의 이야기는 사실 이전에는 내가 너무 슬퍼서, 공감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아서,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그 밖의 다양한 이유로 쉽게 꺼낸 적이 없었다. 막상 내놓고 보니 엄마와 나의 이야기에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쑥스럽기도, 부끄럽기도,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엄마가 여전히 이 세상에서 수백 명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적잖은 위로로 다가왔다. 그 모든 감정이 지나간 뒤에 나는 '읽히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이 글은 그래서 내 글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도와준 콘텐츠 에디터 K가 당시에 뽑은 제목을 그대로 붙였다.
베트남으로 출국하던 날 공항에서, 저 후리스 조끼를 너무 오래 입었다며 다녀오면 하나 새로 사달라는 엄마의 카톡을 받았다. 나는 그러리라 약속하고 비행기에 올랐고, 며칠 후 퇴원했냐는 내 짧은 물음에 집이라는 단어만 남기고 엄만 다른 말이 없었다. 엄마와의 카톡은 이제 더 이상 새 메시지 쌓일 일이 없게 되었고, 엄마 냄새가 가장 많이 배었을 것 같은 저 후리스 조끼는 이제 한 번 만져볼 수도 없다.
2016년 3월 18일
집에서도, 환자복 위에도, 아프기 전부터도 제2의 피부처럼 늘 걸치고 있던 엄마의 조끼는 빈소를 차리기도 전에 누가 치웠는지 그 이후로 본 일이 없다. 얼마나 열심히 찾았는지, 찾다가 포기할 때는 또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게 있는 빨간 조끼는 엄마가 입었던 적은 없을지언정 분명히 엄마의 유품이다. 엄마로 인해 새로이 다짐한 날 샀고, 엄마에 관한 글을 엮어내는 데 바늘귀 같은 역할을 했으며, 엄마가 남긴 그 어떤 옷보다 엄마를 생각나게 하니까. 아니 유품이란 말은 안 할래. 엄마의 생일날 내가 산 선물, 사실은 엄마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