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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n 26. 2020

치과의사 선생님 같은 사람 만날 수 있을까?

이만큼만 접점이 있는 사람이라도 될 텐데 이만큼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얼마 전부터 찌릿찌릿 신경에 거슬리던 왼쪽 윗 어금니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치과를 찾았다. 날 괴롭히던 치아에는 가로로 금이 가 상아세관이라는 일종의 신경관이 드러나 있었다고 하니, 정말로 신경을 건드린 게 맞았던 셈이었다. 치과의사 선생님 처방대로 매일 양치할 때마다 시린니 전용 치약을 썼다. 왠지 나이 든 사람들의 전유물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를 코팅해 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사실은 나이에 관계없이 좋은 거 아니겠냐며 아침저녁으로 나를 위안했던 시간도 벌써 한 달, 경과를 확인하러 오늘 다시 치과에 갔다. 사실 뭐 근본적인 치료는 없었으니까 그간 느꼈던 불편함의 정도가 참을 만 한지가 중요한 거였다. 이가 시린 것은 확실히 덜하지만 이가 약해진 느낌이 든다는 내 말에 의사 선생님이 답해주셨다.


"사실 이가 갑자기 이렇게 된 건 아니고, 치아에 금이 간 상태가 1에서 3까지 있다고 하면, 지금 1과 2의 중간 정도 단계라고 보면 돼요. (차트를 뒤적이며) 기록을 보면, 처음 이쪽 이가 시리다고 왔을 때가 2011년이야."


'2011년이면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했던 해였구나. 이 치과에 다닌지도 참 오래됐네'라고 생각 중이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선생님은 차트를 앞쪽으로 계속 넘기셨다.


"보자... 사랑니를 뽑았던 게 2003년, 17년 전이고 금니를 해서 박은 게 2007년이고요...."


역사책을 읽듯이 손으로 짚어가며 읽어 내려가시던 의사 선생님은 가만히 듣고 있던 나를 안경 너머로 흘끔 보시더니 다시 말씀하셨다.


"이 기록들이랑 다 연관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있어서 읽는 거야. 참 오래도 다녔죠 치과를?"

 

내가 몇 초 전 했던 생각이랑 똑같은 말을 입 밖으로 내시는 선생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 그것도 마스크로 절반은 가린 채 거의 누워서만 봐 왔었지만 그렇게라도 근 이십 년 꼬박꼬박 보다 보니 익숙하고 친근해진 얼굴이었다. 어릴 때부터 다니던 동네 치과에서 새로 생긴 이 치과로 옮겨보자며 엄마 손을 잡고 처음 왔을 때 '선생님 얼굴이 부리부리 잘생겼다' '아니 나는 예전 치과 선생님이 더 잘생긴 것 같다'라고 요샛말로 선생님을 '얼평'했던 엄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부리부리 잘생겼던 '젊은' 치과 의사 선생님은 이제 눈썹까지 희끗희끗하셔서는 본인도 얼마 전 처음으로 신경치료를 받았는데 너무 힘들었다며 아무리 의사라도 나이 들면 고쳐 써야 한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고 계셨다. 이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없을 만큼 치과의사 선생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이 나도 모르게 그렁그렁해졌다. 치과에서 치료받는 중도 아니고 설명 듣다가 눈물이 터지는 황당한 환자로 기록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선생님과 눈 마주치기 전에 필사적으로 호로록 집어넣어서 다행히 들키진 않았다.


이 치과는 지난 20여 년간 우리 가족 모두가 치과 치료를 받는 병원이었다. 내가 영구치를 갖고 나서 생겼던 모든 말썽이 다 그 차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유난히 이에 문제가 많았던 엄마가 이 병원에서 임플란트를 해 넣었던 생각이 났던 것이었다. 치과 보험도 하나 없었던 엄마의 시술비는 보통 비싼 게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픈 엄마가 치아만이라도 좀 건강할 수 있길 우리 가족 모두는 바랐다. 사실 임플란트 시술이 어떤 건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아픈 건지 난 아직도 잘 모른다. 엄마는 늘 혼자서 치과에 갔고, 나는 엄마가 하는 말을 늘 흘려들었기 때문이다. 해 넣어야 하는 이가 한두 개가 아니어서 기간도 오래 걸렸고 분명히 '엄청 아프다'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도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는다. 나는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들었으니까. 이제와서야 엄마가 아프다고 할 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다고 할 때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분명 내 스트레스 지수는 내가 실제로 가졌던 것보다는 높아졌겠지만 엄마의 스트레스는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신경을 써야 하는지 조절하는 내 본능이 너무나 잘 기능한 탓에 우리 엄마는 자기 몫을 그대로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치과의사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 리도 없을 텐데 나는 우리 엄마를 치료한 선생님 보기가 참 부끄러웠다.


이 병원에 엄마의 차트가 아직 있다면 아마 임플란트 시술 완료가 마지막 장에 적혀있을 것이다. 엄마가 남기고 간 잡동사니들 속에 있던 '임플란트 시술 환자 주의사항' 책자는 정말 새것이었고, 그 책을 버리면서 나는 '마지막에 거의 음식도 못 먹었으면서 이는 왜 그 고생을 하면서까지 새로 해 넣었냐'며 허공에 대고 짜증을 냈다. 한 번 써보지도 못한 것처럼 보이는 관련 용품들도 울면서 다 버렸지만 엄마의 이를 그대로 본뜬 마우스피스만큼은 엄마의 일부인 것 같아 차마 버려지지 않았다.


엄마의 이를 그대로 본뜬 마우스피스만큼은 엄마의 일부인 것 같아 차마 버려지지 않았다.


왈칵 눈물이 날 뻔했던 것은 어느덧 나이 지긋해 지신 치과의사 선생님이 엄마의 마지막 치과치료를 포함해서 우리 가족 모두의 역사를 함께하면서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꽤나 큰 치과병원이기 때문에 우리 네 식구라고 해봤자 그렇게 의미 있는 환자가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선생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나는 이 선생님이 우리 가족의 과거를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가끔 '엄마를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하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엄마는 나의 일부이자 내 삶의 30여 년을 구성하는 가장 큰 부분인데, 그 실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나와 같이 사는 일이 가능할까 하는 의심 같은 것이다. 엄마와 내가 보낸 모든 시간은 우리 둘에게만 있지만 그 오랜 세월의 장면 장면이라도 공유하고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엄마 떠난 뒤로 가끔, 사실은 줄곧 해왔었다. 그래서 이 치과의사 선생님이 그런 사람이니까 결혼해야겠다 그런 말은 물론 아니고, 우리 가족이 지난 20년간 치과에서 보낸 점 같은 시간을 공유했음에 이렇게 반응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이만큼만 접점이 있는 사람이라도 될 텐데 이만큼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의 시간은 멈췄고 시계는 자꾸 움직이니까 살 수록 그건 더 힘든 일이 되어가는 건데 나는 알만큼 나이 먹고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인생 모르는 거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당연히 티는 내지 않았는데 선생님은 '오늘 말을 너무 많이 했네' 하시면서 금세 다른 진료실로 가버리셨다. 야간 진료에는 퇴근한 직장인들이 북적이는 게 보통인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대기 중인 환자가 별로 없었다. 결국 신경 치료해야 할 때가 올 테니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출 수 있게 이를 조심히 쓰고 1년 뒤에 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엄마가 있을 때는 치과 예약도, 치과 가라고 알려주는 것도 다 엄마 몫이었는데 이제는 당연히 내 몫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꼼꼼히 잘하는데 왜 그걸 늘 엄마한테 맡겨두기만 했었을까. 잔소리 한마디도 추억이 될 줄 알고 그랬었나 보다. 내가 어릴 때부터 그렇게 현명했나 보다. 치과의사 선생님은 나의 현명함을 눈치못채셨겠지? 앞으로도 모르셨으면 좋겠다. 멀리 이사 가지 않는 한 치과는 옮기지 않고 계속 여기로 다닐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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