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항체 없이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몸처럼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밤 아홉 시 반이 넘었는데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캐나다에 계신 큰 이모였다. 일흔 중반을 훌쩍 넘기신 이모는 지병으로 인한 통증이 심해져서 올 한 해를 응급실로 시작하셨다 했다. 벌써 몇 해 전부터 거동이 힘들어지신 큰 이모부 수발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몸도 아프고 아무것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탄하던 이모는 ‘내가 몸이 아프니까 우리 애들이 집에 와도 뭘 해주지도 못한다’며 오십 줄에 들어선 당신의 세 자녀 걱정을 하셨다. 맛있다고 소문난 건 다 찾아다니는 나를 잘 모르는 우리 아빠가 늘 내 끼니 걱정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려니 했지만 어쩜 엄마란 존재는 자기 자식도 나이를 먹는다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할까 싶었다.
법적 성인이 두 번은 될 나이인 지금, 확실히 세상을 사는 건 어릴 때에 생각하던 것보다 더 쉬워졌다. 모든 걸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태 못하는 건 대부분 앞으로 안 해도 사는데 지장 없는 것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 내고 싶은 건 도전해볼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돈 걱정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갖고 싶은 걸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고 있고, 가끔 '이러려고 돈 벌지' 하며 눈 질끈 감고 지르는 횟수도 해가 갈수록 늘어간다. 새로운 경험들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서 시간 지나 돌아보면 좀 더 쉽고 가벼워지는 일들이 많다. 나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숫자로 표현하는 나이보다는 이런 성장의 징표들이다. '어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어른다운 어른'이라는 말 앞에서 항상 멈칫하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과 마음은 어른이라는 말에 꽤 잘 들어맞게 컸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정의하는 '어른'이라는 말이 얼마나 별것 아닌지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두 세대가 마주 보고 있는 아파트에 살지만 이웃과의 교류는 거의 없다시피 한 내가 앞집 아주머니와 딱 한 번 길게 대화를 했던 적이 있다. 엄마를 보낸 그 해 어느 날엔가 현관 앞에서 마주친 나에게 아주머니는 당신의 친정어머니도 얼마 전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하셨다.
'아... 가끔 굽은 허리를 하고 오르락내리락하시던 그 할머니가 어머니셨구나.'
그때 처음으로 앞집 이웃의 얼굴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다정한 말이었지만 속에 있는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듣고 있다는 식의 반응만 겨우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줌마네 엄마는 꼬부랑 할머니였잖아요. 우리 엄마는 기껏해야 아줌마랑 비슷한 나이었다고요.'
내 생각에 차마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아주머니는 머리 위로 엄마 생각을 둥실 띄운 게 분명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우리 엄마가 아흔 다 돼서 돌아가셨는데도 너무 보고 싶어. 아가씨는 참 얼마나 보고 싶을까."
순간 죄송한 마음이 들어 그 말에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평범하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와 현관문을 닫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라면, 엄마와 보낸 세월이 더 긴 사람이라면 이 슬픔과 그리움을 좀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무슨 근거로 했던 걸까. 그렇게 따지면 갓 스물에 암 투병하시던 엄마를 떠나보냈던 S의 슬픔은 나보다 몇 배는 컸을 테니 그때 그 친구를 더 많이 위로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 친구의 감정보다는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조문 예절을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게 더 급했던 것 같고, 얼마 뒤에 친구를 만났을 때는 멀쩡하게 직장 잘 다니는 그 애를 보고 안심하며 참 '어른스럽다'라고 생각했었다.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아픔에 대해 말하는 게 무슨 소용 있을까. 이해 같은 거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실컷 말해놓은 내 맘만 상할 뿐인 게 당연하다. 엄마의 아픔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나였고, 이십 대 초반 언젠가 엄마를 여읜 S의 아픔을 전혀 몰랐던 나였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이 전혀 몰라준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다. 당연한 거다 그건. 그러니까, 아무 상관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얼마나 슬픈지를 증명 해 보일 필요도 없고,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설명할 필요도 전혀 없으며, 축 쳐진 모습으로 다니며 정형화된 위로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필요는 더더욱 없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새로 관계 맺게 될 사람들에게 우리 엄마의 이야기를 길게 할 일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앞으로는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내 삶에서 너무 중요한 일부인 우리 엄마를 본 적도 없고 그 이야기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랑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을 리 없다.
2016년 4월 8일
엄마의 상을 치른 뒤, 아니 치르면서도 나는 다른 누구보다 S의 생각을 많이 했다. 엄마의 부고를 전하지도 못했는데 장례를 마치고 정신을 채 추스리기도 전에 이 친구에게 가장 먼저 연락했다. 연락 해 주지 그랬냐고 하는 친구에게,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그때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몰라서 미안했다'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네가 오랫동안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고, 십 년 가까이 늦은 사과를 가득 담아서 평범한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 뒤에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았다. 오후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난 세월을 업데이트하면서 내가 먼저 자연스럽게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 경험 밖의 일이라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친구의 지난 몇 년간의 삶이 상상도 못 했던 넓이와 깊이로 펼쳐졌다. 어떤 대목에서는 둘 다 눈물이 터지기도 했고 어떤 대목에서는 내가 친구보다 더 울컥해서 당황스러웠지만 아직 감정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하는 내 상황을 친구는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었다. 서른 살의 어른인 나를 스무 살의 S가 위로하고 앞으로 내가 겪을 감정의 파도와 맞닥뜨릴 현실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주는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에서 한번 이상 겪는 부모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사실 나이가 많다고 덜 슬픈 게 아니고, 더 능숙할 수도 없다는 것을, 나는 그 자리에서 확실히 배웠던 것 같다. S보다 십 년이나 더 늦게.
어떤 사람들은 부모의 죽음이든 자녀의 출산이든 사업의 실패든 어떤 특정한 일을 겪어야 어른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내가 엄마와 헤어지기 전에 불완전한 어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 이후에 딱히 더 완벽해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인 인생의 사건은 개인이 얼마나 어른인지에 상관없이 데미지를 입힌다. 나를 낳아 준 엄마의 죽음을 두 번 겪는 사람은 없기에 어른의 무기인 '경험'이나 '노련함' 같은 건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 인생에 처음이자 단 한번 경험하는 이 사건 앞에 누구나 항체 없이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몸처럼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개인이 가진 내구성에 따라 충격의 정도와 결과는 다를 수 있지만 그 누구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누군가에게 무척 쉬워 보인다면 그것 역시 그 나름대로의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부모님의 상을 치르게 된 사람에게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워졌다. 우리 엄마가 떠난 뒤에 나는 결혼식보다 더 많은 장례식에 갔다.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일 때 꼭 얼굴을 비추고자 하는 내 의지도 있지만 생의 주기 상 이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지인의 부모님이나 가족들이 돌아가신 것도 무척 슬프지만 가끔은 내가 직접 알던 어른들이 너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나보다 어린 그 자녀들이 상복을 입고 선 것을 보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아직 대학생인 삼 남매가 몇 달만에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앞에서 펑펑 울고 있는 것을 봤던 언젠가는 마음이 타는 듯이 비통하고 누군가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지만, 그 앞에서도 나는 절대 '아직 어린데 얼마나 슬플까'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고사는 가족과 이별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으니까 병사보다 더 슬프다느니, 그래도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을 하고 자기 가족을 꾸렸으니 덜 슬프겠다느니 하면서 슬픔을 상대화 시키는 주제넘은 말도 감히 하지 않는다. 몇 살에 겪어도 어떻게 겪어도 그 이유 때문에 슬픔이 누구보다 더하거나 덜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을 쥐어짜 내서 하는 그 비교가 당사자에게 콩알만큼의 위안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아니까.
내가 확언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장례식을 치르고 물리적으로 떠나보내는 그 시간에 어느 정도의 슬픔을 겪었든 그 이후에 올 것이 훨씬 더 크다는 것. 한편으로는 누구든 돌아가신 부모님을 마음 한 구석에 모셔두고 그 뒤로 한 평생 살아가야 하는 거라면 마음속의 방이 조금이라도 덜 복잡할 때 가장 편안한 위치에 가지런하게 잘 배치 해 두는 게 오히려 나은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이런 말도 지금 힘든 일을 겪어내는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생각만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