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랑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으신 아줌마에게서 우리 엄마를 느꼈다
가족의 형태와 관계는 다양해서 단순하게 말할 순 없지만, 가족 중에서 딸과 엄마 사이만큼이나 친구란 이름이 걸맞은 관계도 없을 것이다. 상점이나 병원, 여행지 등에서 딸이 엄마랑 티격태격하고 있는 걸 볼 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엄마들의 반응은 제각각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의사소통이 처음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고, 그런 장면 앞에서 항상 나는 엄마와 나의 케미를 떠올린다. 친하지만 다정하지만은 않은, 자주 같이 다니지만 늘 사이좋지만은 않은. 그냥 엄마랑 딸 같아 보이는 사람들만 있어도 그 가족의 이야기는 뭘까 상상해보면서 자연스레 엄마와 나의 에피소드를 떠올릴 때도 있다.
딸내미 둘이랑 같이 들어와서 탕에서 셋이 이야기하는 아줌마 가족을 보는데, 자꾸자꾸 눈길이 갔다. 특별히 엄마 생각이 난다던가 엄마 언니 나 세 사람 생각이 나서도 아닌데 그냥 자꾸 쳐다보게 됐다. 엄마랑 목욕탕에 다시 못 오는 건가 정말. 우리 엄마는 홋카이도 료칸이 그렇게 좋았다고 발 동동 굴렀는데. 흰 눈 쌓인 로텐부로(露天ぶろ, 노천온천)에서 몸을 누이고 너무 좋다고 계속 말했었는데. 다시 한번 못 가는 건가 정말. 목욕탕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바보 같게도 천국에 사우나 찜질방 같은 게 있을까 궁금해졌다. 우리 엄마 고생 많이 했으니 좋아하는 때도 밀고 황토방에서 지지고, 자다가 아파서 깨는 일 없이 푸욱 잠도 자고 했음 좋겠는데. 천국에는 그런 거 없어도 좋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거라면 꼭 좀 사우나 했음 좋겠다. 그리고 이십 년 가까이 꾸준히 해 오던 수영도 숨 쉬는 걱정 없이 맘껏 했으면 좋겠다.
2016년 3월 17일
모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엄마와 나의 관계를 생각나게 하는 친구 중에 Y가 있다. 두 엄마들 사이에 크게 공통점이 있는 건 아니다. 몇십 년간 직장 생활을 하셨던 Y네 어머니와 달리 우리 엄마는 아빠를 내조하는 게 일이었고, 그밖에 다른 건 자세히 알지도 못한다. 비슷한 점이 있다면 두 분 다 2014년에 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점,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Y와 나 둘 다 암환자의 가족으로서 힘겨운 시간을 공유했다는 것. 꼭 일 년 간 직장 동료였던 우리는 회사 곳곳에서 틈날 때마다 엄마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의 투병과 그걸 지켜보는 딸의 마음을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못할 이야기도 더 깊이 할 수 있었다. 우리 엄마보다 몇 개월 늦게 대장암 진단을 받으셨던 Y네 어머니가 치료를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짐을 싸서 나오셨다는 말에 나는 울었고, 얼마 써보지도 못한 약에 내성이 생겨 기대 여명이 줄어든 우리 엄마 얘기에 Y도 자기 일처럼 마음 타 했다.
전이가 진행된 4기로 발견된 우리 엄마는 초반 일 년 동안 먹는 약으로 치료를 하면서 몸에 큰 무리 가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Y네 어머니는 수술이 가능한 단계였기 때문에 진단 초기부터 버텨내야 할 일이 많으셨다. 원발암이 생긴 장기가 다른 만큼 치료법도 많이 달라서 우리 엄마는 마지막에야 시도했던 독한 항암주사도 몇 번이나 계속해서 맞으셨고, 그때마다 구토에 오심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고 힘들어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우리 엄마 기도를 할 때는 항상 같이 기도했고, 어느 한 분에게 차도가 있을 때마다 두 분 다 같이 건강해질 수 있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투병 두 번째 해에도 Y의 어머니는 입퇴원을 반복하며 항암을 계속했고,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힘내서 이겨내셨다. 가족들 모두가 함께 싸워야 했던 그때, 친구는 '이렇게 계속하다가 내가 지쳐서 엄마를 포기하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워' 라며 나에게 안겨 울었다. 그러나 힘든 거 싫어하는 우리 엄마는 마치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처럼 화학 항암요법으로 인한 괴로움을 거의 겪지 않고 그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시름시름 기운이 없었던 우리 엄마로서는 같은 치료를 했더라도 아마 체력이 받쳐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병이 아무래도 더 나아지지 않는 것 같은 날에는, 'Y네 엄마는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데 우리 엄마는 왜!'라고 원망하기도 했고, 그렇게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 엄마는 응급실 갈 일이 너무 잦아서 Y네 엄마처럼 공기 좋은 데 요양도 못 가고!'라는 아쉬움을 느꼈다. 친구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었지만.
친구는 우리 엄마의 부고를 듣자마자 달려와 마지막 발인예배 때까지 사흘 내내 빈소에 다녀가며 나를 챙겼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후에 내가 가까운 지인들의 장례식을 여러 번 다니면서 보통 정성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Y의 얼굴을 보며 '왜 우리 엄마만'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더 힘든 치료를 많이 받은 친구의 어머니는 아직도 버텨내고 있는데 왜 우리 엄마는 여기서 끝나버렸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그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누구보다 고마운 Y의 얼굴을 보는 마음이 미안하고, 그래서 더 어려웠다.
누가 그랬다. 엄마의 인생의 많은 부분은 나로 구성되어 있다고. 그래서 내가 내 삶을 잘 살아나가는 것이 엄마를 이 땅에서 계속 숨 쉬게 하는 거라고. 진부한 이 말이 곱씹게 되리라곤 이전에 생각하지도 못했었는데... 마지막까지 자기 할 일 다 하고 포기하는 게 없었던 내가 너무 칼 같이 나와 엄마를 분리했던 것 같아 죄스러웠던 그 마음을 Y가 위로해 주었다. 평상시처럼 내 삶을 흔들림 없이 잘 살아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안심할 수 있었을 거라고. 엄마가 나에게 했다던 '걱정 없다'는 그 말뜻을 다시 생각할 때마다 울다 웃다 했는데, 오히려 엄마의 마지막 나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걱정 없이 회사 가고 출장 가고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들을 보내는 날 보며 엄마도 아주 조금은 걱정을 놓을 수 있었던 거겠지 싶다.
(중략)
오늘은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막판에 Y 보고 말문이 터져서 또 (지겨울 법도 한) 엄마 얘기 잔뜩 하고 펑펑 울었네. 언제 이런 게 다 담담해지는 걸까. 얼마나 걸릴까. Y네 어머니를 꼭 보러 가고 싶은데 눈치채실까 봐 그러질 못하겠어서...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웃으며 찾아뵈어야지. 그리고는 우리 엄마가 얼마나 행복하셨고 지금 얼마나 편하신지 말씀드려야지.
2016년 3월 31일
장례를 치른 뒤 몇 주 만에 Y를 만났다. 서로의 엄마를 위해 같이 기도했던 만큼 Y의 마음도 무척 힘들 수 있었을 텐데 자기 엄마 얘기는 하나도 꺼내지 않고 내내 우리 엄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나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친구를 보면서, 이 친구와 함께 달려온 길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면서 펑펑 울다가, 친구가 이제 홀로 가게 될 길을 함께 걸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언젠가 우스갯소리로 결성했던 암 투병하는 엄마를 둔 딸 모임, 암딸모 회원의 자격은 이제 없어졌지만 그래도 그 심경을 가장 잘 이해할 사람이 나니까.
내 지나온 힘든 시간을 너무나도 잘 아는 친구에게 그간의 업데이트를 하느라 또 한바탕 눈물 잔치를 했지만, 그게 또 나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빈 곳을 메꾸어야 하는 사이니까. 친구는 고생 많았다며 함께 견디어 가자는 말을 남겼다. 그렇지만 나는 이왕 함께 할 거 견디지 말고 즐기고 싶다. 지나온 시간들이 말해주듯, 힘든 일은 또 올 것이고, 올해가 최악인가 하면 그 기록을 깨는 상상 이상의 일들이 어김없이 다가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고, 끈덕지게 살아남아 더 강해져서, 보다 큰 시련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야 만다. 나는 그 혹독함을 재미나게 이겨낼 월동준비를 하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함께. 또 한 고비 넘겼다. 다음 고비도 우리는 함께 넘을 것이다. 그다음 고비도, 그 다음다음도.
2016년 4월 5일
친구는 그 해가 다 지나가도록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자기 엄마에게 하지 못했다. 틈틈이 혜빈이네 엄마는 좀 어떠시냐고 물어왔던 어머니의 희망을 꺾는 일이 될까 봐 나도 부디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후로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완치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신 어머니께 비로소 친구는 "엄마, 사실 혜빈이네 엄마 돌아가셨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아. 그런 것 같더라"라고 대답하신 어머니가 대체 어느 시점에 어떻게 알아채셨는지는 아직 미스터리다.
Y네 어머니의 투병도 가을 지났으니 이제 2년이 넘어간다. 우리 엄마보다 훨씬 경과가 빨리 나빠지셨던 것 같지만 기저질환이 없고 원 체력이 좋으시니 그 힘든 항암을 몇 번이나 하시고도 배겨내시는 것. 엄마를 떠나 살면서 매주 걱정을 달고 살았을 친구의 한 해가 새삼 그려졌다. 너도 나 못지않은 어려운 시절을 보냈구나. 잘 싸웠다 친구. 오늘날 만나러 나온다니까 혜빈이 엄마 감기 조심하시라고 전하셨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코가 찡했다. 꼭 잘 이겨내시기를. 그리고 병을 이기는 것뿐 아니라 그 가족이 평안함과 화목함 가운데 이 시간을 잘 이겨내고 승리하기를 조용하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2016년 12월 27일
친구는 재작년 겨울 결혼을 했고, 병색 하나 없이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신 친구의 어머니를 그때 처음으로 뵙게 되었다. 마주치지 마자 "혜빈이구나" 하고 나를 알아보신 어머니가 다른 말 없이 끌어안아 주셨다. 나도 마음으로만 말했다. '뵙고 싶었어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우리 엄마랑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으신 아줌마에게서 우리 엄마를 느꼈다.
팔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김지영 배우가 별세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투병 사실조차 몰랐지만 급성폐렴으로 2년의 투병생활을 끝내게 되었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몇 년생이신지부터 찾아보게 되었다. 38년... 우리 엄마보다 16세 더 많으셨고, 79세시라니까 나이로는 만 18년 더 오래 사신 셈. 고인의 소식은 그것대로 안타깝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 엄마는 정말 젊었었구나 하는 서운함과 억울함과 그 밖의 복잡한 부정적 감정들이 또 한 차례 몰려온다. 다 쓸데없는 것. 우리 엄마가 배우보다 못하게 살아서 걸린 병도 아니고, 배우가 아니어서 못 받은 치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엄마가 처음 표적치료를 시작할 때 '이레사를 투약한 환자의 평균 생존기간이 22-24개월'이라고 들었던 것에서 김지영 씨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싶다. 떨쳐야지. 앞으로 살면서 보고 듣고 마주할 더 많은 슬픔 속에서도 읽어내야 할 것은 단 하나, 질병 앞에서 인간의 노력과 성취들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가 하는 것이다.
2017년 2월 19일
우리 엄마 뻘 되는 아줌마들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늘 엄마랑 비교하면 어떤 지부터 생각하게 되는 건 이제 어쩔 수 없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 사람보다 우리 엄마가 더 못 누린 점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점차 줄어들었다. '엄마는 그래도 나 같은 딸이 있으니까 성공한 인생이지!'처럼 뻔뻔하게 생각해볼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슬픔을 거두어야 한다는 다짐도 한 적이 없다. 엄마랑 딸의 관계가 보통 그렇듯이 엄마 생각을 하는 마음도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니까. 다만, 누군가의 부고 뒤에 있는, 가족들의 힘들었던 시간과 마음, 그 눈물과 기도까지도 이제는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다. 다 안다고는 말 못 하지만.
모두가 울지 말라고 할 때, 오히려 외로움과 슬픔을 느낄 때마다 함께 계실 테니 울음을 그치지 말라고 하는 너의 그 위로가 좋다. 참 진실된 너의 말이기 때문에 힘이 된다.
2016년 4월 23일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가족에게, 투병의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모두에게, 특별히 더 애정이 가는 암딸모 회원들에게, 모두 몸과 마음 건강하시길, 힘든 일이 있을 테지만 마음을 붙잡고 잘 이겨내길 바라는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