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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매일단어

스테인드글라스

세상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하는 건 보통 아닌 사람들의 덕이다

by 담쟁이

꽤 오래전에 '너와 나는 너무나 달라서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없겠다'는 표현이 담긴 장문의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정확히 어떤 것 때문에 그런 말을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앞으로 상종하기 싫다'는 말을 구태여 고상한 말로 표현한 그 정성스러운 편지에 내가 한 답장의 내용은 대충 기억이 난다.


"너는 너와 다른 사람하고는 같이 가지 않는구나. 하지만 걷는 길에 나랑 같은 사람들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겠니. 나는 내 주변에 나랑 다른 색깔과 모양의 사람들이 있는 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런 것만 봐도 너랑 나는 참 다른 사람이 맞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나를 네 곁에 두기 힘들다면 그렇게 해. 나는 너를 내 주변 어딘가에 그대로 둘 테니 시간 지나고 다른 생각이 들면 말해줘."


그 뒤로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저 정도로 공식적인 절교선언은 다른 누구에게도 받은 적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특별히 상종 못할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 말을 한 사람도 손을 잡고 까지는 아니지만 내 주변 어딘가에 여전히 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번째이자 아직까지는 마지막인 절교선언은 이제 헛웃음 나는 일화가 되었지만 그래도 내게 남긴 것이 있다면 보편성이라는 신화를 깨어버리려는 노력과 내 주변 사람들이 나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 자주 생각해 보는 습관이다.


개성과 특출남을 갈망하는 시대지만 틀에 박힌 직장인 라이프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보편성은 미덕이자 기초 자격과도 같다. 속한 집단에 따라 편차는 있을지라도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처음엔 놀라움의 대상이, 그 경험이 더해지면 험담의 대상이, 결국에 생각을 고쳐먹지 않으면 불편함의 대상이 되고 만다. 언제나 호기심도 질문도 많고, 바른 소리는 즉시 입 밖으로 내놓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의 나는 어떤 생각에 동의하기 위해 남들보다 꼭 두세 번 많은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필요했고, 그것만으로 남과 조금 다른 사람 취급을 받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그러한 다름 때문에 특별히 미움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오히려 장점이자 매력으로 봐주는 사람이 더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인 시선일지라도 '다르다'는 표현의 기저에는 '같은 우리'와의 구분이 있는 셈이다.


자기 자신을 '보통사람'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라든가 '따로 또 같이 사는 세상'이라든가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우리' 바깥의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말이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해 같은 견해를 보인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 비슷한 정서를 느끼고 그에 대한 표현도 닮아있다. '우리'는 같은 것에 기뻐하고 같은 것에 분노한다. 그런 '우리'들이 베풀어 준 포용 속에서 나는 '우리'를 다양하게 하는 '흥미로운' 혹은 '호감인' 타자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도식화하자면 '우리'들이 새빨간 원이라면 그 원을 가장 가운데 두고 지름이 커질수록 흰색에 가까워지는 동심원들이 그라데이션을 이루고, 그 위에서 나는 핑크 정도는 될 수 있겠지만 결코 빨강은 아닌 사람이었다. 그나마 빨강에 가까운 핑크인지, 흰색에 가까운 옅은 핑크 인지도 빨강인 사람들의 판단에 달려있었다. 굳이 빨강을 예로 든 이유는 나한테 핑크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자신의 사고방식이 언제나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는데 익숙한 나 같은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언제나 같은 색으로 맞출 수 없다는 사실에도 익숙하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는 언제나 같은 생각을 하지도, 같은 정서를 보이지도 않는다. 감정표현은 천차만별이고 기뻐하는 지점도 분노하는 지점도 항상 같지 않다. 그런 다양함 때문에 서로를 오해할 수도 배척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설명하는 것을 쉬지 말아야 하고, 자기 자신을 꿋꿋하게 지키며 살 이유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속한 우리는 빨간색의 원 안에 뭉쳐지는 종류의 것이 절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양과 색깔이 다른 별개의 조각이고, 나랑 가까운 사람이라 해서 같은 모양과 색깔일 리도 없다. 그건 바깥쪽으로 그라데이션 되는 동심원이 아니라 색색깔의 스테인드글라스에 가깝다. 다른 색깔의 사람이 다가왔을 때 명도와 채도가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가며 이 그라데이션의 중심을 이루는 '우리'와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둘지 결정하기보다는, 이 새로운 색과 모양의 조각이 스테인드글라스의 전체 그림을 얼마나 재미있게 바꿀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편이 나에게는 훨씬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남들과 생각이 조금 다른 사람들이 '보통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것은 보편성 속에 숨은 사람들의 근거 없는 편견에 가깝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경직된 사고를 가졌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이런 글을 읽는다고 해도 본인 이야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뭐 괜찮다. 세상은 어차피 보통사람들의 것이니까.


하지만 세상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하는 건 자기 주변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가진 보통 아닌 사람들의 덕이다. 그래서 가끔 내가 '우리'라고 생각했던 이들로부터 명백하게 선을 긋는 말을 듣지만, 말하는 사람도 인지하지 못하는 편견의 말이 모두를 웃게 하는 농담으로 꽂히는 상황도 많지만, 가끔은 억울한 비난을 받고 드물게는 '달라서 같이 할 수 없다'는 선언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나의 이 살짝 다른 포지션이 꽤 맘에 든다. 세상을 바꾸고 방향을 틀어놓을 수 있는 건 다수에 속한 보통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늘 옳은 건 아닐지라도 최소한 내가 생각하는 가치나 방향성에 대해서는 스스로 허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더욱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걸 보통 사람들은 고집쟁이, 천덕꾸러기, 또라이 등 여러 가지 다른 말로 부르겠지만 상관없다. 남들로부터 좋은 말로 불리는 건 어차피 내 행복의 조건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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