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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다음이 와 준다면 그거야말로 인생의 덤이 될 테지

by 담쟁이

삶의 몇몇 변곡점 이후에 모든 것을 마지막이라 생각하는 병 아닌 병이 생겼다. 나는 다음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남들보다 적은 편이다. 다음으로 미뤄서 잃은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나에게 준 영향은 대부분 크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생긴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일상을 잃어버린 일 년간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내 병과 비슷한 종류의 마음의 생겼을 것이다. 기약 없이 취소된 여행은 언제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르고, 얼굴 한 번 보자는 가벼운 말이 영원처럼 먼 기약이 되는 것 외에도 실제 황망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있다면 다음이 없다는 것만큼 아프게 와 닿는 사실은 없을지도 모른다.




석양을 보러 올라간 오름 꼭대기 이름 없는 무덤 곁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불그스름한 그라데이션이 주는 마지막이라는 암시 때문에 평소에는 다정하던 노래도 무척 애잔하게 들렸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이처럼 마음 한 겹에 따라 다르게 전해진다.


자그마한 소행성 B612에서 의자를 끌어당겨 석양을 마흔네 번이나 보았다는 어린 왕자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그 날 그는 너무 슬펐을 것이다. 어쩌면 슬픔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는 해를 반복해서 보면서 슬픔을 증폭시키기보다는 해가 완전히 내려간 뒤 곧 찾아오는 어두움 속에 가만히 있는 시간이 그에게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밤에는 모든 것이 잠드니까, 석양의 애잔함도 활동을 멈출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쓸쓸함이 저물고 완전히 깜깜해진 밤하늘에 뜬 달과 별을 보며 생각했다.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해는 지금 어딘가에서 떠오르고 있다고. 내가 있는 이 지점에서 나는 내일 다시 뜨는 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침이 오기 전에 재난재해가 올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생각하며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태양이 쉬지 않고 일하는 한 지구 위 모든 곳에 일제히 해가 사라지는 일은 없고, 한 편에서 지는 해가 반대 편에서 기운차게 떠오르는 그 일들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는 일임을 생각한다.



그래,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좋은 점이 있으니 괜찮다. 혹시나 다음이 와 준다면 그거야말로 인생의 덤이 될 테지. 오늘의 이 석양도 내가 지난번에 그렇게 바라마지 않았던 ‘다음의 석양’이라 생각하면 감격스럽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확신에 가까운 말투로 다시 한번 말해보았다.


“다음은 없고 이게 내가 지구에서 보는 마지막 석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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