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2000>를 보고
되돌릴 수도 없고 지워지지도 않는 뜨거운 기억 하나 있었으면 했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낭만적 인생의 필요조건일 것 같았다. 속삭여 불어넣은 시절과 인연을 다시 꺼내볼수도 없게 단단히 틀어막은 지금, 잊을만 하면 생각나는 음악과, 눈빛과, 실루엣과, 온도와 냄새까지, 화양연화는 영화라기보다 어떤 감정이다. 야한장면 하나 없이 너무나 관능적이고 울고짜는 신파 없어도 죽도록 슬프다. 이 영화를 보며 나는 60년대의 홍콩을 살다가 2000년대의 흑석과 상도를 돌아다니다가 또 2010년대의 어느 밤을 걷기도 한다. 사실 영화를 많이 보지만 잘 잊어버리는 편이다. 장만옥이 아이라인을 얼마만큼의 길이와 각도로 빼서 그렸는지, 양조위의 가르마가 어떤 비율이고 어느 이마에 곰보자국이 있는지까지 다 기억하는데도 이 둘이 어떻게 시작하고 또 끝나는지 그 섬세한 감정의 변화와 신호들만큼은 항상 삭제돼서, 다시 보면 언제나 새롭고 떨리고 또 애가탄다. 지난 시월, 서랍에서 발견한 2000년대 유물 VCD로 오랜만에 봤는데도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보니 전혀 새로운 작품인듯 심장이 두근두근. 생각해보니 처음 본 것도 대학생 때 영상자료실 컴퓨터 모니터고 영화관 스크린과 음향으로 본 게 난생처음이다. 20주년 이라니. 왕가위 전작 리마스터링 재개봉이 줄줄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니, 확실히 오래 살 가치가 있다. 해피투게더 기다리고 박스셋 살림처럼 장만해야지. 와 어른되니까 좋다. 상상만으로 기분이 두둑하다.집에 오는 길에는 영화보고 받은 A3 포스터를 보물처럼 가슴에 안고 Nat King Cole 버전의 ‘quizás quizás quizás’를 듣는데 가사 뜻이 귀에 들어온다. 감동. 이러려고 스페인어 배웠어. 세상에 모든 게 다 제 쓸모가 있다. 오래 기다리다보면 알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