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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Aug 07. 2020

감정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굴까

<마티아스와 막심, 2019>을 보고 

"어떤 우정은 청춘만큼 흔들리고 사랑만큼 강렬하다"

영화 홍보를 위해 과장하고 왜곡하는 일이 흔한 카피들 속에서 마티아스와 막심의 내용을 너무나 간결하게 잘 짚은 이 문구는 단연 돋보인다.

자비에 돌란 감독은 '이것은 우정에 관한 영화'라고 말하며 ‘인생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굳건한 친구 사이에서 어느 순간 우정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날 때, 이것이 어디로부터 온 마음인지, 언제부터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혼란을 겪는 두 친구'가 주축이 된다고 설명한다.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던 이성에게 어느 순간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라면,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가 되진 못했을 것이다. 그 감정을 받아들여 연인의 관계로 발전하는 것은 물론 조금 더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익숙한 누군가, 삶의 일부로 알고 지낸 사람과의 관계가 지금과 다른 국면으로 전환된다는 건 생의 주기 변화에 맞먹는 사건이니까 모든 사람이 그런 위기를 감내할 용기를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감정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굴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누가 언제 만들어서 보편화된걸까. 단지 사회에서 기대하는 성역할이나 육체관계의 유무로 관계에 꼬리표를 붙이기에는 너무나 모호한 지점이 많다. 그래서 위험이 된다. 영화 속 리베트의 여동생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상 속에서는 내가 나를 정의하는 것 조차 어려워졌기에 더욱 그렇다. 우정과 사랑 사이에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다. 미움과 사랑도 그렇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도, 회사에서 졸린건지 일하기 싫은건지도 인상주의와 표현주의가 공존하는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 없는) 느낌이다.

나는 본성상 그런 불분명함 앞에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내는 사람이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고 그런 상황 앞에서 주저함 없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이진법처럼 0 아니면 1로 표현되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여기까지는 우정, 여기까지는 사랑 정확히 나눠지면 좋은데 보통은 물 많이 섞인 수채화에서 색이 섞이는 그 지점처럼 모호한 느낌이 계속된다. 나는 그런 감정을 명확히 해야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용기내어 다른 국면으로 전환시켰던 관계들을 돌아보니 그 때 명확히 했어야 했던건지, 애초에 명확히 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좀처럼 후회하지 않는 내가 ‘그 때로 돌아간다면 전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한다.

여기에 공감이 안된다면 학창시절 맘 맞는 동성 친구와 애인보다 더 가깝게 지내서 주변사람들의 장난섞인 놀림을 받곤 했던 경험을 생각 해 볼 수도 있다. 분명히 우리가 함께 보낸 시절은 우정이었지만, 성인이 되어서 만난 많은 친구들과는 분명 성분이 다른 우정이고, 우리가 울고불고 했던 감정들은 연인에게 느끼는 그것과 조금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 나를 정확하게 대입할 수 있었다. 나를 둘러싼 많은 관계들과, 그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내가 느꼈던 무수한 감정들, 감정들, 감정들... 많은 감정들이 가득한 영화고,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정들이 무엇이었는지는, 내가 살면서 느낀 대부분의 감정들이 그렇듯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말로 설명할 수 있고 나는 분명 그런 재능이 있는 사람이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러고싶지 않다.

어느 마티아스와 막심 프레스 인터뷰 영상에서 감독인 자비에돌란은 '이 영화가 <로렌스 애니웨이>의 게이 버전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고 몇 초전까지 가득하던 장난기를 쏙 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다. 자신의 영화를 분석한다는 사람들이 항상 '엄마'나 '동성애' 같은 코드가 반복된다고 말하지만 결국 자신의 영화는 삶을 다루는 것이라고. 누구에게나 있는 엄마가 영화적으로 탐구하기에 아주 흥미로운 주제이듯 역시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사랑이나 우정의 감정을 다루는 것도 결국 삶을 다루는 것이라는 설명, 얼마나 확신에 찬 말인가. 이에 덧붙여 "오, 내가 굉장한 헤테로 섹슈얼 영화를 봤는데 말이야..." 라는 말은 안하지 않느냐는 말을 던지는 그의 대답은 아주 가느다란 퀴어 코드만 보여도 같은 부류의 영화로 묶어놓고 나름의 공식대로 해석하려는 이들을 향한 일침인 동시에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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