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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Feb 26. 2023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순간들

<애프터썬, 2022>을 보고 

내가 초등학생일 무렵부터 언니가 결혼하기 전까지 거의 이십여 년 간 매년 1월이면 어김없이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다. 숙소도 일정도 코스도 항상 너무나 비슷한 패턴이어서 정확히 몇 년도였는지 기억하기 어려운 어느 해의 여행에서 아빠는 운전하던 차를 세우고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다. 사실 그전 며칠도 여러 번의 통화를 심각하게 주고받았기 아빠가 애썼던 어떤 일이 안 좋게 돌아갔고 지금이 그에 관한 마지막 통화라는 걸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소식을 전해온 듯 한참을 듣고만 있던 아빠는 알았다고 건조하게 전화를 끊은 뒤 핸들에 머리를 파묻고 잠시 흐느껴 울었다. 차에 타고 있는 가족의 존재를 잠시 잊은 것처럼. 수 분 뒤 가족여행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재개되었지만 그 전과 그 이후 기억이 모두 사라진 지금까지도 아빠가 핸들에 머리를 파묻고 울던 장면에 대한 기억만은 선명하다.


다른 자녀들에게 '아빠의 사회생활'이란 늘 베일에 싸여 가려진 부분이겠지만 '교회집 딸'에게 그것은 비교적 투명했다. 아빠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말들,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상황들을 나도 비슷한 수준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가족으로서의 관점이 하나 더 추가되니 아빠를 둘러싼 한 가지 사건을 볼 때 다른 사람보다 더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위에서 아빠를 울린 그 통화가 뭐와 관계된 건지 오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삼십 년 넘게 아빠의 제자이자 아끼는 측근으로 곁에 두었던 한 사람을 스스로 떠나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보탰고, 각자 믿고 싶은 것들이 사람 수만큼의 진실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았다. 어떤 이는 아빠가 매정하다고 했고, 이번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손에 칼을 쥐는 일을 해왔다고도 했고, 감히 나에게 와서 너희 아빠 성격에 그렇게 될 줄 알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편의 진실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 딴의 지혜를 쏟아낼 때 아빠는 그 무성한 말들을 인정하듯 매정하게 매듭을 지었다.


핸들에 머리를 파묻고 울었던 아빠의 모습은 영영 내게만 남아있다. 이렇게 글로 쓴다 해도 그때의 그 장면을 직접 본 것처럼 깊은 인상을 주진 못할 테니. 하지만 그런 내게도 비어있는 조각은 그때 아빠의 마음과 생각이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순간들은 아무것도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은 채로 토막 난 영상처럼 내 기억에만 남았다. 이제 와서 '그때 왜 그랬어?'라고 물어볼 수도 없을 만큼 아련한 옛날 일들의 파편은 시간이 더 흐르면 내 시점만 남아서 영원히 더 바래져만 가겠지.




엄마와 딸만큼은 아니지만 아빠와 딸도 잔잔한 가족 영화에서 이미 많은 변주를 해 왔던 소재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가 감동 포인트인지, 저 사람은 왜 저러는지 전혀 설명해 주지 않는 '독특하게 불친절한' 영화 <애프터썬>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던 아빠와의 어떤 순간을 떠올린 딸이 나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주인공이 열한 살 어린 소녀가 아니라도, 아빠가 불안정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아빠와 딸은 원래 그렇게 오해하고 불통하기 좋은 관계다. 설명이 필요 없다고 느끼거나 설명이 안 통하거나 대부분 그 둘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니 그 여름의 기억이 소피에게 죄책감과 트라우마로 계속 남지 않았으면, 아빠의 면면을 직접 보고, 겪고,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나 자신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다. 아무리 깊어봤자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은 칠십을 바라보는 우리 아빠가 아니라 열 살과 여덟 살 두 딸을 둔 삼십 대 후반의 아빠까지일 테니까. 자식은커녕 결혼도 안 한 나로선 그마저도 반쪽짜리일 게 분명하다. 아마도 삼십여 년 전 만들어진 영화를 보듯이 평생 느리게 따라잡아가야겠지. 그 시간차가 좁혀지다가 없어져버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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