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고
언젠가 선물 받았던 박준 작가의 에세이를 펼쳐 읽던 중 이 한 문단이 내 마음을 잡아끌어 오래 곱씹게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떠한 양식의 삶이 옳은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편지는 분노와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나는 편지 쓰는 것을 즐긴다. 좋아하는 것이나 취미를 묻는 질문에 '편지 쓰기'라고 답하는데 오래 망설이지 않을 만큼이다. 고백이나 사과, 심지어 이별에 이르기까지 카톡이나 SNS로 모든 말을 전하는 세태를 걱정하는 이들은 면대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나도 그에 동의는 하지만, 대면 의사소통보다 더 진심 어린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쪽은 언제나 손으로 직접 눌러쓴 편지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꼭 연인이나 짝사랑하는 오빠에게 보냈던 편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보낸 모든 편지에는 상대방이 정성껏 읽고 알아주었으면 하는 내 마음이 들어있다.
하지만 편지를 쓴다는 것은 그렇게 손쉬운 일만은 아니다. 직접 쓴 편지는 수신인에게 도달하기까지 꽤나 복잡한 단계를 거쳐야 하고 우체국을 통하는 편지라면 그 복잡함은 배가된다.
경험을 통해 생각해 보자면,
해외에서 친구에게 한 장의 엽서를 보내는 것은 친구의 주소를 따로 메모해서, 현지의 느낌이 잘 담긴 엽서를 고르고 골라, 바쁜 여행의 시간을 쪼개 편지를 쓰고, 우체국의 위치와 영업시간을 알아내거나 우표 판매처와 우체통의 위치를 각각 따로 알아내어야 하는 수고를 거쳐야-그것도 배달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가능하다. 그러나 그 쉽지 않은 일을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사서 하는 까닭은, 보내는 내가 들이는 노력보다 받는 이가 느끼는 기쁨과 사랑받는 느낌이 몇 배는 더 크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효율이 좋은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N 년 전 군인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곰신으로서 지냈던 1년 10개월은 내가 얼마나 사소하게, 그렇지만 끈기 있게 편지를 쓸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서 자처한 일임에는 분명했지만 어느 정도의 희생과, 어느 정도의 과시와 그 밖의 복합적인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동기의 결과물은 우표를 붙여서 보낸 162통의 편지였고, 계산해 보면 그의 입대부터 전역까지 나흘에 한 통 꼴로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던 셈이다.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지금 내가 보낸 그 편지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는지 방구석에 처박혔는지 알 수 조차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편지를 보낸 당시 내 마음의 크기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건, 지금은 흉내도 낼 수 없는 소중한 마음임에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귀찮은 편지 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언제나 말하고 나면 후회할 일이 더 많은 내 입의 어리석음을 부지런히 막아내고 싶고, 지극히 사소한 감흥도 글로 남겨 또렷하게 전하고 싶다. 자고 나면 사라질 수도 있는 설렘과 애정들도 우주에서 흩어지기 전에 그 존재의 증거를 부지런히 남겨두고 싶다. 거창한 사랑의 실천은 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저 내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묵묵한 사랑의 표현은 편지를 쓰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