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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Nov 26. 2021

로그

내 로그이자 우리의 로그인 이 관계

일 년여 만에 만난 친구는 언젠가 영화 리뷰를 남기는 앱에서 내 이름을 우연히 보고는 내가 남긴 기록을 들여다봤다며 '너는 뭔가 로그 log를 남기는 걸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십 년 넘게 친구로 지낸 그가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서운할 정도로 확실히 나는 기록에 특화된 인간이다. 특히 영화, 책, 공연이나 강연, 춤과 다이빙에 이르기까지 인상 깊게 경험했던 것에 관한 매일의 기록을 남겨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로그는 일기 쓰기와는 또 다른 영역이고 거기서 오는 기쁨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다. 벌써 천 삼백 편이 넘어가는 영화 별점 평과 칠백 사십여 개쯤 되는 짧은 코멘트는 단지 영화에 대한 기록일 뿐 아니라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대한 역사이자 나에 대한 기록, 곧 나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걸렸다. 자기가 남긴 기록들을 계속해서 조금씩 지우고 있고 앞으로도 지울 것이라는 그의 말이. 감상은 당연히 바뀔 수 있고 그럴 때마다 덧붙이거나 다시 쓸 수도 있는데 구태여 지워버리고 마는 그의 행동 기저에, 자기가 지나온 삶을 후회하는 마음이나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을까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그 애의 표정과 말투에서도 나는 늘 어딘지 모르게 세상을 겉도는 불안정함을 전해 받곤 하니까, 허세 가득한 그의 화두와 근황에서 오히려 지금 얼마나 엉망으로 지내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걱정되지만 내색은 절대 할 수 없다. 매번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다가 싸우듯 헤어지는 게 보통이지만 이번엔 용케 아주 격한 지점까지 가진 않았다. 모진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언제나처럼 다정한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철철이 궁금하고, 만나서 얘기하다 결국 서로 신경 건드려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일 년에 한두 번 생존 신고 없으면 불안한 이런 관계가 이십삼 년째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어쩌면 이 친구와의 관계가 유년 시절부터 이어진 로그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헤어져 돌아가는 길에 앞으로도 잘 쌓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너는 앞으로도 계속 너의 로그를 지워가겠다고 했지만, 이것만은 절대로 지우지 못하게 해야지. 내 로그이자 우리의 로그인 이 관계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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