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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Feb 04. 2022

꽃에 대한 내 사랑을 고백한다면 꽃다발은 뭐라고 대답할까

축하받을 일이 많았던 지난 몇 달간 꽃 선물을 여러 번 받았다. 소박하게 툭 묶어서 던지는 것부터 플로리스트의 혼이 담긴 작품 수준까지, 크기로는 내 몸통만 한 꽃다발까지, 정성으로는 새벽에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직접 고르고 만든 것까지 정말 각양각색의 다양한 마음들이 색색의 꽃이 되어 내게로 전해졌다. 화병에 꽂고 벽에 걸어 말리기도 하고 그래도 처치 곤란인 몇 개는 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대로 선물하기도 했지만 그중 너무 예뻐서 주인 없는 빈집에 하루 종일 두기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들은 출근길 지하철을 헤치고라도 사무실로 가져와 내 책상 앞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았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에서 사무실로 옮겨와 일주일 넘도록 모두를 기분 좋게 해 주었던 꽃바구니가 장식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느낀 어느 날 아침이었다. 바구니째로 번쩍 들어 화장실로 가져가서 하나씩 꽃줄기를 뽑아내자 물을 흠뻑 머금은 오아시스가 어쩐지 징그러워 보이는 구멍들을 드러냈다. 더러운 것을 대하듯 팔을 쭉 뻗고 손 끝으로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니 몇 분 전까지 꽃이었던 형체는 간데없고 남은 건 몇 가지로 분리배출해야 할 쓰레기 더미일 뿐이었다. 1950년대 빈티지 스타일이라 했던가, 크고 화려했던 꽃바구니일수록 배출해야 할 폐기물이 더 많다는 건 그리 아름답지 않은 모순이다. 하지만 꽃다발과 꽃바구니의 더 큰 모순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꽃을 대하는 그 결과에 있다.


꽃은 취향을 정확하게 모르는 상대에게도 할 수 있는 난이도 하의 무난한 선물이다. 꽃가루 알레르기 같은 경우만 아니라면 문제 될 일 없고, 생일이나 기념일, 각종 축하할 일은 물론이고 반대로 슬픈 일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활용 가능하다. 받는 사람이 꽃을 좋아한다면 효율까지 더해진 최고의 선물이 된다. 꽃을 좋아한다는 말이 세상 만물 중 꽃만이 가진 아름다움에 감동한 경험이 있다는 뜻임을 안다. 아무 기대 없이 불쑥 꽃을 받았을 때 당혹스러움이 아니라 입술 끝에 실룩실룩 미소가 배어 나온 적 있는 사람이라면, 철철이 예쁜 꽃을 곁에 두고 가까이서 위안과 평화를 얻고 싶은 그 마음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답고 아끼는 꽃의 생명줄을 뎅겅 잘라서 줄로 꽁꽁 묶어 두는 꽃다발이란 어딘지 모르게 조금 불편하다. '나는 꽃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꽃다발을 사랑한다'라고 그 둘을 분명히 분리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예외겠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물성을 통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어떻게 그 근본을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꽃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 자주 꽃다발, 꽃꽂이, 꽃바구니 등의 형식으로 꽃을 자르고 묶어내야만 하는 모순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지난 몇 달 동안 몇 번이나 시들고 마른 꽃의 잔해를 정리해 버리면서, 이것들을 받을 당시 내가 아름답다고 느꼈던 생생함과 조화로움이 마치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코르셋을 죄어 만들어낸 여성의 곡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꽃을 더 예쁘게 만들어서 즐기고 싶다는 말은, '사랑해서 그랬어'라는 소름 돋도록 상투적이고 폭력적인 말을 떠올리게까지 했다. 만일 내가 그런 식으로 꽃에 대한 내 사랑을 고백한다면 꽃다발은 뭐라고 대답할까. "나는 그런 식의 사랑은 받고 싶지 않아."라고 말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 꽃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먹지도 못하는 거 처치 곤란인데 무슨"이라고 대답하면서도 뜬금없이 누군가에게 '오다 주웠다'를 시전 할 때는 꽃 선물을 애용하던 나였지만 이제는 좀 더 솔직해지려고 한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더는 부인하지 않겠다. 그러나 꽃을 좋아하기 때문에 꽃 선물을 주고받는 게 불편하다. 그렇다고 더 이상 꽃 선물을 주고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첫째로 형광등 불빛을 햇빛처럼 쬐고 사는 사무직으로서 작은 꽃이 가까이에서 주는 위안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살면서 내게 꽃 선물을 할 사람(그리고 했던 적 있는 사람)이나 나아가 우리나라 화훼업 종사자들을 이 글로써 괴롭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내가 꽃보다 더 센스 넘치는 선물을 고르는 데 도무지 재능이 없는 까닭도 매우 크다. 다만 '꽃을 사랑하니까 꽃 선물을 좋아한다'라며 당연하게, 그리고 아주 해맑게 이야기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꽃이 '누가 이딴 식으로 날 사랑하라고 했냐'라고 아우성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일말의 미안함을 가지고 잘 돌보고, 가급적이면 살아있는 화분을 주고받고, 키우게 된 식물은 최선을 다해 죽이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육식물과 선인장까지 죽여본 경험이 있는 나니까 되도록 식물은 푸르른 자연에 나가서 즐길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난 세월 꽃을 사랑한다는 말로 꽃의 생명을 꺾어온 내가 속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봄만 와 봐라, 어마어마한 속죄의 꽃놀이를 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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