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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May 22. 2022

고장

혼자서 일 인분의 삶을 꾸릴 줄도 모르는 내가 나중에 고장 나지 않도록

아침에 세탁기에 돌린 빨래 한 통을 베란다에 후다닥 널고 집을 나섰다. 해가 넘어갈 무렵 돌아와서 다 말랐나 하고 나가보니 어쩐 일인지 옷가지들이 바닥에 떨어져 난장판이었다. 천장에 달아놓은 건조봉을 끈으로 묶어서 높이 조절을 해 두었는데 세월의 작용인지 끈이 저절로 삭아서 끊어진 모양이었다. 벌써 여름 기운이 도는 한낮의 햇빛 덕분에 바싹 마른 녀석들은 어느 시점에 낙하했는지 단서조차 주지 않은 채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우리 가족이 살기 시작한 후로 18년의 세월이 그대로 쌓인 이 집에서 내 취향대로 꾸민 공간은 거의 없다. 베란다를 터서 확장시킨 거실이나 수십 개나 되는 액자들의 위치는 물론이고 내 방의 구조까지도 엄마 아빠가 만들어준 그대로인 이 집에서 나는 가끔 내가 인지하지도 못했던 물건들과 마주친다. 딱히 숨겨져 있지도 않았던 것들의 존재를 깨닫는 계기는 보통 고장이 났을 때다. 


'반가워 건조봉. 너는 거기 살고 있었구나' 


혼자 살게 된 이후로 빨래를 한 게 몇 백번일 텐데, 옷걸이를 거는 이 건조봉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걸려있어 더 손댈 일도 없고, 옷가지를 직접 너는 게 아니니 딱히 청소를 한 적도 없고,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던 이 건조봉을 끈으로 묶어서 고정시킨 건 누구였는지 궁금해한 적도 없다. 물어볼 것도 없이 아빠였겠지만 그게 이 집에 이사 온 직후였는지, 그 이후 언제쯤이었는지, 아니 애초에 거기 끈이 있는지 없는지 눈치도 못 챘으니까.


'너를 어쩌면 좋니...' 


며칠 전에는 불 꺼둔 화장실 등이 간헐적으로 깜빡깜빡하는 걸 발견해서 전기 접속 문제인가 의심만 해본 채 손 놓고 있었는데, 그걸 해결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이 터져버렸다. 내 생활 반경의 몇 배나 되는 집안을 꼬박꼬박 청소하는 것만 해도 버거운데, 여기저기 고장 나고 망가지는 부분은 귀찮고 힘들다고 마냥 미뤄둘 수가 없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니 매 사건이 황당하고 난감하기까지 하다. 가족이랑 같이 살 때부터 있었던 것들이 하나하나 나 여기 있다고 존재감을 드러낼 때마다 그 모든 것들을 모른 체 할 수 있었던 때가 그립고, 삶은 얼마나 고단한지 새삼 느낀다. 고장 난 것들을 내버려 두면 그 상태 그대로 있고 누구도 대신 고쳐주지 않는 그런 날들이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되는 거겠지. 반드시 내 손으로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엄마는 어떻게 했을까. 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다 잘했던 걸까.   


가족 중 아빠와 나만 이 집에 남았을 때, 따로 나가 살겠다는 나를 붙잡기 위해 아빠는 본인이 나가는 쪽을 택했다. 그래도 혼자 있는 내가 신경 쓰일 때마다 우편물 핑계를 대며 슬쩍 냉장고를 채우러 들어올 수 있으니까. 운전하며 아파트 앞을 지나가는 길에라도 방에 불이 들어왔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몇 해 전 거실 백열전구 몇 개가 동시에 나갔을 때도 내가 차일파일 미루는 사이 집에 들러서 전구가 아니라 조명 자체를 LED로 교체했었던 아빠는, 이번에도 말만 하면 빨래 건조봉을 새것처럼 고쳐놓을게 뻔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진 않다. 동반자가 있든 없든 내 몫의 삶의 분량인데, 정말 도움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걸 느끼면 너무 막막할 것 같아서, 아직 혼자서 일 인분의 삶을 꾸릴 줄도 모르는 내가 나중에 고장 나지 않도록 미리 보수하고 기름칠하는 마음으로 혼자 해보고 싶다. 부디 유튜브 어딘가에 도움 될만한 내용이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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