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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Aug 09. 2022

홍수: 도림천 범람과 서울 홍수에 관한 기록

누구든 탓할 수 있지만 누구를 탓해봐도 마음 속 참담함이 가시지 않는다

광복 이후 최고의 물난리가 났던 어제, 시간당 480mm의 비가 폭탄처럼 쏟아지면서 범람한 도림천이 신대방역부터 난곡까지 동네 전체로 확장한 것 같은 믿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비가 평소처럼 오는 지금 시간당 강우량이 2.5mm 정도라니까 그의 200배 넘는 강수량이 한꺼번에 다 쏟아진 셈이다. 도림천 범람과 서울 홍수가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가 되면서 서울에서 가장 부유한 강남 서초의 실황과, 가장 낙후된 동작 관악 지역, 그중에서도 전통적인 저소득층 밀집 주거지역인 난곡의 실황 사진이 소셜미디어 상에 많이 흘러 다녔다. 새벽 내내 사이렌을 울리는 신림역 인근 도림천의 모습과, 보도블록 위 늘어선 노점과 일층 상가에 속수무책으로 물이 들어 차는 모습, 도로에 둥실 떠서 이동하는 차량들, 정강이까지 차오른 물을 헤치고 귀가하는 사람들의 풍경이 합쳐져 아수라장이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상황이 바로 우리  앞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가늠하는 지인들은 바쁘게 안부를 물어왔지만, 아파트 위에서 실시간으로 내려다보이는 물바다와, 5 거리 반경에서 서너 시간째 물을 퍼내고 있을 사람들의 얼굴 때문에 보송한  안에서도 괜찮다는 대답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9   도림천 범람과 산사태 주의보로 시작한 재난문자는 점점 빈도가 잦아지더니 자정을 넘어서자 긴급 대피 경보로 바뀌었고, 우리 집에서 5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로 저지대 거주자를 임시 대피시키는 문자가 새벽 3시가 넘은 시각까지 날아왔다. 지하를 포함한 4층짜리 건물인 우리 교회는 도림천 범람 주의라는 재난문자가 도착할 즈음부터 지하로 콸콸 물이 들어찼다고 하고, 자정이 지난 시간에 '속수무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새벽까지 연락이 없던 아빠는 날이 밝자 텔레비전  대를 제외하고 에어컨, 냉장고,  어떤 가구나 집기도 그대로 침수되는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며 망연자실하게 연락을 해왔다. 천장까지 물이 차올랐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동이 터오고 나서야 물을 퍼내기 시작할  있었던 모양이다. 잠도  자고 밥도  먹고 밤새 작업을 했지만 어떤 피해도 막을  없었던 아빠가 '살면서 더한 일도 있는데'라는 말을 하자, 겨우 방에서 걱정하느라  시간 남짓 쪽잠 자고 피곤을 말하던 나는  뜨자마자  수밖에 없었다.


비가 그친 짧은 틈에 바깥에 나가보니 어젯밤 물바다였던 온 동네는 붉은 진흙밭으로 변해있었고 도림천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팔뚝만 한 굵기의 통나무가 길 여기저기에 던져져 있었다. 보도블록은 처참하게 깨져있고 맨홀 뚜껑이 없는 곳도 곳곳에 보였다. 양수기로 지하층에서 물을 퍼내는 사람들과 그 난장판을 뚫고 다시 출근길에 나서는 사람들의 낯빛이 하나같이 어두워보였다. 지난밤 반지하 방에서 십 대 자녀를 포함한 일가족이 침수로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한 내 마음도 아직까지 해가 들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반지하 세대가 수해를 입었을지, 재산을 포함해 그들의 마음과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클지 생각해보니 앞으로 며칠 더 지속된다는 비가 벌써부터 원망스럽다. 자연재해 앞에 부자와 빈자가 받는 피해는 같다지만 복구와 회복에 있어서 그 차이는 엄청날 것이다. 자본을 기반으로 한 회복력은 모든 것을 빠른 시일 내에 정상화시키겠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터전을 잃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삶과 마음은 그보다 훨씬 느린 회복의 길을 갈 것이다. 누구를 탓해야 할까. 하필 관악 동작 지역 위에 더 격렬한 고기압 간의 싸움을 만든 하나님? 하수관리, 치수 사업 예산을 줄인 서울시? 상습 침수지역 방재를 평소에 충실히 해놓지 않은 지자체? 아니면 이 모든 이상기후와 관련 있는 기후변화의 주범인 인류 전체를? 누구든 탓할 수 있지만 누구를 탓해봐도 마음 속 참담함이 가시지 않는다.


기억하는 모든 삶을 이 동네에서 보낸 사람으로서 수차례의 물난리를 겪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피해 정도가 크고 충격적인데, 살면서 이런 일이 더 많아질 거라는 상상을 하면 그 알 수 없는 싸움을 해 나가며 살 자신이 없다. 작년에 유럽 대홍수 뉴스를 보며 '어떡해'만 외치다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재난재해를 만나니 반출생과 인구 멸절에 관한 의지가 더욱 굳어진다. 이런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주면 뭐할까. 죄 없는 아이들이 고통 속에 이전 세대들이 남긴 똥물에 침수되어 죽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 인류는 다음 세대를 가질 자격이 있는 걸까?


예정대로라면 오늘 저녁 7시 반에 아빠랑 연극을 보러 갔을 텐데, 취소도 양도도 할 수 없는 표는 이번 침수 비용으로 계상하기로 했다. 난생처음 나와 단둘이 보러 가는 공연에 들떠서 일찍 만나 저녁을 먹고 가자는 아빠 때문에 반반차 신청도 미리 내고 나도 꽤 기다렸는데 그래도 복구되는 대로 가보자던 아빠는 한 시간여 전에 '도저히 안 되겠다'는 카톡을 보내고 또다시 연락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집이 다 잠기는 마당에 무슨 연극이냐 싶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치환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게 엉망진창. 머릿속도 엉망진창.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지만 일은 하나도 못했다. 해가 나기 전까지는 마음에 볕이 들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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