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헌 옷 같은 사람이 되기까지 조금 더 만나봐도 되겠다 싶다
사심 없는 첫 만남 이후 꼭 1년이 되었다는 어제를 지나니 다음날인 오늘이 또 기념할만한 날이라고 한다. 원래 기념일이란 것에 정말 심드렁한 편인데 일단 강아지처럼 졸랑대는 사람이 있고, 뭐 커다랗고 부담스러운 기념을 하자는 건 아니니 그 정도는 맞추게 된다.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그간의 잘못을 정산하듯 정말 개차반 같은 인간과의 같잖은 연애를 백일 남짓 하고, 그 뒤로는 정말 체질인 것 마냥 단타로 짧게 쳐내는 연애만 몇 번을 했다. 이십 대 때 까지는 못해봤던 짝사랑도 '신나게' 두 번이나 해 보고 나서 어느 정도 내린 결론은 '내겐 연애가 특별히 필요하다기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그 상황과 느낌 자체가 에너지를 준다'는 사실이었다. 에너지는 물론 여러 가지 경로로 얻을 수 있는 거니까 그야말로 연애란 삶의 여러 가지 동인 중 작은 하나일 뿐이었고, 조금이나마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주는 순간 가차 없이 걷어차다 보니 호흡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었다.
지난 팔 년 중 최장기 근속 연애를 기념하는 날을 보내고, 별일 없으면 앞으로 보낼 날들이 계속해서 삼십 대의 기록을 경신하리라 생각하니 조금은 더 특별한 기분이 든다. 어쩌면 지난 업보로 생긴 '삼백일을 못 넘기는 저주'가 풀리는 순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내 공덕이 아니라 상대방이 쌓은 덕이라 생각한다. 따지고 넘어가기 좋아하는 내가 크게 기질 죽이지 않았는데도 이렇다 할 싸움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건 결국 맞불 놓지 않고 적당히 꾹꾹 눌러 꺼뜨린 사람의 노력이 아니면 설명하기가 어렵다. 기질상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반대가 아니면 감당하기 쉽지 않은 나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버릇을 가진 주제에 연애에 있어서는 그 어떤 확언도 쉽게 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아직 이 친구가 집에 안 가는 것은 정말 귀찮은 편이므로, 편안한 헌 옷 같은 사람이 되기까지 조금 더 만나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