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늦가을 너의 생일날이었다. 서로 싱거운 안부를 물으며 ‘내년 여름’ 쯤 보자는 인사를 했던 게. 여름의 마지막 달을 열며 ‘이때쯤 보자며’라고 말을 건넨 것도 벌써 한 달 반 전, 약속 없이 불쑥불쑥 만나곤 했던 감도 이제는 다 떨어졌는지 몇 번을 엇갈리다가 가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때가 오고 나서야 겨우 만나게 되었다.
2. 길이가 조금 긴 탓인지 곱슬기라곤 하나도 없는 축 처진 머리가 눈을 살짝 가렸다. 두 해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몸은 좀 더 두툼해졌지만 운동을 한 건 아닌 것 같고. 언제나처럼 부자연스럽게 과장된 몸짓과 표정. 내가 기억하는 너와 똑같은 네가 내가 매일 다니는 카페 구석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이상했다.
3. 우리 둘 다 새파랬을 때부터 너는 항시 몰입하는 취미가 하나씩 있었다. 한 때는 게임이었고, 한 때는 문학이었고, 음악이었던 때도 있다가 지금은 미술로 옮겨간 듯했다. 어느 한 가지에 빠지면 보통 이상으로 파고드는 성향이 있는 너는, 세상에 그렇게나 매혹적인 것이 많은지 볼 때마다 새롭게 탐닉하게 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흥분한 채 늘어놓곤 했고 나는 그런 너의 세계를 구경하는 게 항상 좋았다. 언젠가부터 옷을 사기 귀찮아서 프레스기를 들여놓았다는 너는 이름 모를 작가의 그림을 전사한 흰색 티셔츠 한 장과 검은 에코백 한 개를 건네주면서 멋지지 않냐며 소년처럼 웃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게 너다워서 나도 웃었다.
4. 시답잖은 단어 하나에 꽂힌 우리는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답 없는 논쟁을 펼쳤다. 언쟁을 피하려고 애써 봤지만 결국 언성을 높이다가 의견을 좁히지 못한 채 시간에 쫓겨 헤어지는 인사를 했다.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만나면 언제나 그랬다. 아무렇지 않진 않았지만 그 감정조차도 너무나 익숙했다. 아까 하던 얘기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며 전화를 건 너에게, ‘이게 마지막 전화일 수도 있는데 이런 어이없는 주제로 마지막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결국 우리는 아까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각자의 입장도 한 발짝씩을 물러서지 못했다.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만나면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언제나와 같이 서로에게 상처를 잔뜩 주었다.
5. 우리는 또 한동안 휴지기를 가질 것이다. 나는 혼자서 쿨다운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과열한 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래서 이 휴지기는 육 개월이 될 수도, 일 년이 될 수도 있다. 이번이 이 년 만이었으니 그보다 더 긴 시간이 될 수도 물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의 너를 우리가 논쟁했던 그 바보 같은 주제로 기억하진 않을 것이다. 너는 불쑥 찾아와서 선물을 건네는 사람, 나를 떠올리며 에코백과 티셔츠를 만들어 주는 사람, 답에 이르기까지 말 걸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오랫동안 연락 없어도 또 어제 본 듯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니까. 설사 이번이 서로를 보는 마지막 만남이었다 해도 너는 내 인생에 있었던 꽤나 괜찮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