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단어

친구

by 담쟁이

“난 또 뭐라고... 나는 정말 대단한 일인가 긴장했어. 너 그러는 거 보니 귀엽다 귀여워."

첫 직장에서 존댓말 나누는 사이로 만나서 이제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된 H언니는 그날도 귀여워 죽겠다는 말을 건네며 상기된 얼굴로 짝사랑남에 대해 늘어놓는 내 말을 잘랐다.

우리는 분명 친구였다. 각자의 동네 근처에 갔다가 시간이 나면 편하게 연락해서 불러낼 수 있는 사이였고, 재미있는 축제나 맛있는 집을 발견하면 서로에게 제안했고, 여럿이서 여행을 가거나 캠핑을 할 때도 멤버로 한 번쯤 고려해 볼 수 있는 그런 적당한 거리의 친구였다.

하지만 만남의 거리와 대화의 거리는 같고도 달라서, 재밌는 걸 즐길 때는 평등한 우리의 관계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때만큼은 삶을 살아온 시간에 따른 위계, 우리가 처음 만났던 업무적 관계보다 더 수직적이고 명확한 질서를 따르곤 했다. 내 기쁜 일은 언니에겐 언제나 '그런 것에도 기뻐할 수 있어서 부러운' 것이었고, 화가 나는 일을 나누는 끝에는 어김없이 나의 치기와 짧은 생각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게 나보다 풍부한 인생 경험에서 나오는 사려 깊은 조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언니와의 모든 대화는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거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것 이외에도 이상하게 나를 작아지게 하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 대화 끝에 발견하는 나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 일희일비하는 사람이었고, 성급하고, 기복이 심하고, 또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을 하고도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삶의 기쁜 일과 슬픈 일, 그리고 화가 나는 일을 항상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분명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여러' 요소들 중 '하나'라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나름의 방식이 있고, 대다수의 이들에게는 그것이 감정적으로 의존하고 내가 보지 못한 것을 알려주는 사람의 존재와 그와의 관계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아니라는 것을 꽤 오래 지속되었던 H언니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조금씩 깨달았다. 물론 그것이 언니와의 관계가 끝났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세포가 일정량 있다고 한다면 어느 시점에선가부터 그 세포가 하나둘씩 죽어서, 하나도 남지 않는 순간이 오는 것과 같다. 그 순간이 왔을 때, 나는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앞으로 우리의 관계까지 해치지 않도록,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그만두어야겠다는 아주 건조한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너무 힘들 때는 언제든 연락 해. 잘 지내고~!"

그날도 헤어지며 언니는 손 흔들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어른이 되어서 만난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받기 어려운 따뜻하고 다정한 끝인사. 손을 흔들며 그러겠노라 답했지만 마음의 소리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너무 힘들 때는 말고요. 조금 괜찮을 때 연락할게요. 항상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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