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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해치 Jul 02. 2018

초상화의 변화

사회가 변화하면서 초상화의 역활과 목적도 바뀌었죠.

초상화는 사람의 얼굴을 그린 그림입니다. 영어로는 Portrait라고 하죠. (저는 늘 Portrate라고 잘 못 쓰곤 했습니다. 헷갈린다구요 저거.)


아마 우리에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초상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고흐의 자화상이(귀를 자른 것 말고도 아주 많은 자화상을 그렸죠.) 아닐까요? 

아,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도 아주 유명합니다. 특히 렘브란트의 그림은 주제가 도드라지고 명암대비가 강해서 특히 아시아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약조절이라고 하죠. 빛을 받는 부분에 모든 묘사 에너지를 쏟아 부어 화려하게 표현하여 보는이의 시선을 잡아 챕니다. 반면 빛을 못받는 부분은 과감하게 어둠속으로 묻어 버림으로써 밝은 쪽으로 시선을 모아주죠. 저런 강양조절을 실패하면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그림이 됩니다. 마치 2시간 내내 건물과 자동차만 계속 폭발하는 액션영화가 보기 피곤한 것 처럼요. (마이클베이 감독의 영화처럼 말이...죱웁웁.)

Self Portrait as the Apostle Paul(1661)

이미지출저: Google arts & culture


초상화는 왜 그리기 시작했을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영속적인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예술성도 가지고 있죠. 이러한 인간의 본능적인 예술성은 원시미술(primitive art)에서 구경 할 수 있습니다. 동물을 많이 그렸는데 주술적인 의미가 강했다고 하죠. 내일 사냥에서 꼭 잡고 싶은 동물을 벽에 그림으로써 용기를 얻고 '난 이미 잡았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초상화에 영혼이 담긴다하여 사람 얼굴그리는 것을 금한시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처음 사진기가 들어왔을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도 하죠.) 오늘 잡은 동물을 기념하여 그렸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두고 두고 기억하고 싶었나 봅니다.


다시 서두로 돌아가서, '남기다'와 '예술'적 본성은 '나의 모습을 널리 알리고 후대에 전하겠다'는 지도자의 욕구와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왕과 가족들은 초상화를 계속 그렸죠. 아기가 태어나면 그리고, 그 아기가 자라서 개를 키우기 시작하면 또 그 개와 함께 그렸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초상화 제작 자체의 비용이 비쌌기 때문에 이렇듯 왕과 귀족 또는 부유한 상인의 초상화가 대부분인 이유입니다. 

 초상화는 말 그대로 얼굴을 그린 그림입니다. 특별히 사이즈가 클 필요가 없죠. 모나리자 그림의 크기는 77cm * 53cm입니다. 실제로 본 사람들이 '생각보다 작네'라고 생각할 만 하죠? 왜냐하면 권위와 위엄을 뿜어낼 필요가 없는 일반인의 초상화는 클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 사람얼굴과 비슷한 크기면 충분한 거죠. 집에 걸어놓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왕의 초상화는 많고, 크고, 화려합니다. 프랑스의 최장수 왕이었던 루이 14세(Louis-Dieudonne XIV)의 보시죠. 

Full-length portrait of Louis XIV (1638-1715), king of France and Navarre, in armour with the crown and the sceptre on the table, before a seascape

After Claude LefebvreCirca 1670


루이 14세는 태양왕(Le Roi Soleil)으로 불리는데요, 그는 왕권신수설(왕은 신이 정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왕의 권위는 신으로 부터 하사받은것)을 믿었습니다. 그 스스로 왕의 권위에 얼마나 큰 합당성과 권위를 부여했는지 짐작 할 수 있죠. 특히 그의 공적의 많은 부분이 프랑스의 세력을 전 유럽으로 확장시킨 것 이었습니다. 특히 3번의 대규모 전쟁(VS 네덜란드, VS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 VS 스페인 왕위계승전)으로 대표되죠. 

루이 14는 아~주 많은 초상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5살부터 왕이었으니까요.) 각 초상화는 다른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데요, 위의 초상화는 루이 14의 전쟁군주로서의 면을 모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죠. 그리고 손에 든 지휘봉과, 테이블위의 왕관, 배경의 큰 배가 떠있는 그림은 그가 진취적이고 성공적인 전쟁군주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 시선은 화면 밖을 한치의 망설임 없이 응시하고 있는데요, 자신감 함께 전쟁군주로써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난 멈추지 않는다.' 같은 느낌이랄까요. (물론 이 부분은 저의 자의적인 해석입니다.)


이렇듯 초상화는 주로 권위의 표현과 국민 계몽을 위한 수단으로 역할 하였습니다. 

하지만 산업화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하게 되죠. 


인문주의적 예술: 초상화

위의 제목은 하버트 리드는 그의 저서 '예술의 의미(문예출판/박용숙 옮김)'에서 초상화를 정의한 문장입니다. 워낙 훌륭한 표현이 있어 한 꼭지만 더 인용하겠습니다. 

따라서 인문주의적인 뜻에서 훌륭한 초상화란 '어떤 개인의 성격에 대한 충실한 묘사'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산업화 이후 그림 제작 도구의 가격인하와 부유한 상인계급의 증가, 그리고 인본주의적 사상이 강화되며 초상화는 점차 '우리의' 모습을 담게 됩니다. 이 지구에서 중요한 것은 왕과 귀족뿐은 아닌게 된 것이죠. 나 그리고 내 옆의 '우리들'이 모두 자아와 개성을 가진 객체로써 존재함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고흐는 아주 훌륭한 초상화 화가였는데요, 군집의 섬세한 감정을 묘사한 이 그림을 보시죠.

Portrait of Joseph Roulin

Vincent van Gogh1889


아마 최근에 개봉한 영화'러빙 빈센트'를 보신 분들이라면 단박에 아셨겠죠? 고흐가 아를의 노란집(이 그림도 아주 유명하죠.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입니다.)에서 고개을 초대하여 감격에겨워 함께 그림을 그리다가 고갱과 싸우고, 귀를 자르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죠. 이때 고흐의 친구가 된 사람이 바로 우편배달부 Joseph Roulin 입니다. 고흐는 이사람을 아주 친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밝고 화사한 색감과 장난스럽게 물결치는 수염은 그가 유쾌한 사람이었던 것 같은 인상을 주죠. 붉은 입술은 그가 말이 많지만 성가시지 않은, 오히려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게 합니다. 특히 고흐가 그를 좋아했다고 생각되어 지는 부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이 초상화에 넣었기 때문인데요, 우리도 좋아하는 사람에겐 다 주고 싶잖아요? 고흐도 그랬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녹색, 노랑색, 파랑색과 꽃, 그리고 그 당시 연습하며 자신감을 얻었던 붓터치를 통한 선의 형태의 감정표현까지 말이죠. 


그럼 이 초상화를 보시죠. 

The potato eaters

Vincent van Gogh1885


'감자먹는 사람들'이란 작품인데요, 고흐는 특히 이 작품에 많은 노력을 쏟았습니다. 암스테르담의 반고흐 미술관에 가시면(아니면 Google arts & culture에서) 연습작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위의 두 그림을 보면 두번째 그림이 더욱 인물의 표현이 성실하게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보통 초상화는 인물의 얼굴을 통해 대상이 살아온 인생과 현재의 성격, 성품을 묘사하는데, 여기에서는 특히 거칠고, 둔탁하고, 울퉁 불퉁 튀어나온 관절의 손을 통해 당시 농민의 녹록지 않은 그들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즉, 이전까지의 초상화가 대상의 외적인 부분(부, 명예, 생활 양식)에 집중 했다면

19세기 미술부터는 본격적으로 대상의 내적인 부분(개인의 성격 과 심리상태)에 더욱 깊게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죠.


이번 글을 통해 한국의 초상화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요, 뭔가 흐름이 꼬일 것 같아서 우선 생략했습니다. 다음에 자세히 다루어보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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