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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한 권의 책,
졸정원(拙政園)

전혀 '졸(拙)'하지 않은, 과장된 레토릭의 졸정원

by 해달 haedal


쑤저우에서의 이틀째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


여름 여행이 좋은 것은 비가 내려도 춥지 않고

옷을 간편하게 입고 다녀 비를 약간 맞더라도 뭐 괜찮다는.

오히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즐길 수 있다.


대기가 촉촉하면,

사진에도 그 물기가 어린다.


일행 중 한 사람은 공자의 성씨를 가진 문무를 겸비한 역사학 연구자이자 탐험가.

무예를 좀 하기에 무술의 땅 중국에 오니 호위 무사처럼 보였다.


이런 정도의 가는 비에는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통역 겸 가이드 겸 호위무사의 도움을 받아

졸정원 근처 간이식당에서 기름기 없는 소박한 아침을 먹고 졸정원을 둘러보았다.


식당에서 나오니 빗줄기는 잦아들고 대기는 맑아.

정원을 거닐기에

또한 사진 작업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졸정원 사진만으로 사진집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깊이 몰입하여 나의 마음에도 드는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림도 그렇듯, 사진도

하나의 대상에 대해 다양한 이미지가 제작될 수 있다.


대상 자체도 변한다.

계절에 따라, 하루 중 어느 때인가에 따라, 날씨에 따라

대기의 상태에 따라, 빛에 따라...


그리고 이미지를 제작하는 사람도 그 한 사람 자체에서만도

심신의 상태에 따라, 기분에 따라, 관심이나 감각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무엇보다,

졸정원 자체가 읽을거리 풍부한 텍스트,

두툼한 한 권의 책이었다.



쑤저우의 정원들과 졸정원


쑤저우에는 물이 많고 정원이 많다.

쑤저우의 정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만 무려 아홉 곳.


졸정원(拙政園) 유원(留園) 망사원(網師園) 환수산장(環秀山庄) 창랑정(滄浪亭) 사자림(獅子林) 우원(耦園) 예포(藝圃) 퇴사원(退思園)


중국 4대 정원으로 졸정원, 유원, 이화원, 피서산장 등을 꼽는데

그중 졸정원과 유원, 두 곳이나 이곳 쑤저우에 있다.


대부분 개인이 소유했던 정원으로 그 규모가 놀랍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때부터 형성되어 송대에 성숙된 후, 명대에 발달, 청 대에 절정을 이루었다고.

청대 말기에는 170개가 넘는 정원이 있었다고 하니 중국의 정원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


졸정원은 그런 중국 강남 쑤저우의 대표적인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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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저우는 비단으로 큰 부를 일구었고

쑤저우의 그 많은 정원은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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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 주변 의자에 놓여있던 중국 전통적인 회화인 수묵 채색화를 모티브로 한 양철통.

이런 소소한 것도 그 지역의 문화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여행의 즐거움.


나는 이런 작은 것에 눈길이 간다.

어떤 것은 구입해 한국에 돌아와 잘 보이는 곳에 두는데 보며 여행의 감흥을 배가시키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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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사자 석등 조각이 귀엽다.


전혀 '졸'하지 않은 정원을 '졸'정원이라 이름 붙인 주인의 능청스러운 레토릭 감각.

아기 사자 석등에도 졸정원의 '졸'을 구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혹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리 한 것인지

어딘가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인지...

다소 높은 벽의 답답함을 단박에 풀어주는 아기 사자.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한다.




이 정도 규모도 저 멀리 보이는 사람의 크기로 볼 때 실내 정원으로는 꽤 큰데


이런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붉은 종이 등.

높은 나무 문에 정교한 문양.


중국 영화를 많이 봐서인지, 친근하고 이국적인 느낌을 동시에 받는다.

스크린이나 TV 화면에서 보던 것을 바로 눈 앞에서 공기를 숨 쉬며 마주하는 즐거움이 크기에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들여서 먼 길을 온다.


그 문화의 정수에 가까운 것을 경험하면,

그 문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텍스트가 주관적으로 확장되어 여행 이후의 내 일상이 더 풍요로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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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히 얹은 작은 기와가 잔물결 같다.


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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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산책이 가능한 긴 회랑에 투각 창은 바깥 풍경도 보이고, 긴 벽을 시각적으로 시원하게 해주는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도록 기능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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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과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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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회랑에 변화를 주는 여러 방식이 보인다.

각도를 변경한다든가, 입구의 형태를 달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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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들어설 때 보이는 벽에 회화나 조각을 설치하여 변화를 주기도 한다.

졸정원의 설계자는 배치에도 공을 들였을 것 같다.




기암괴석


쑤저우 고대 정원 양식은 공통의 코드를 공유하는데

가산과 연못, 호수를 두고, 주변에 누각을 세워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다고.


가산은 돌을 쌓아 정원에 관상용으로 두는 가짜 산을 말하며, 원어는 석가산 (石假山).

가산을 구성하는 태호석은 거뭇한 색에 침식에 의한 구멍이 뚫려있어 복잡하고 다소 기괴한 형태를 띤다.

쑤저우 정원 구성에서 가산, 태호석이 중요하며, 쑤저우의 이런 고전 정원 양식은 중국 대륙 전체에 영향을 주었는데 베이징의 이화원도 쑤저우 정원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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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괴석에 대한 취향은

자연이나 삶의 예측 불가한 측면에 대한 은유를 포함하고 있는 것 아닐까 싶다.



구불구불 독특한 담장


졸정원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 중으로 담장을 꼽고 싶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을 따라 흰색 낮은 담장이 이어진다.

용이 꿈틀꿈틀 날아다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임을 동북아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보면 알 수 있다.

붓으로 자유롭게 곡선을 그어놓은 듯도 하다.


동굴을 만들어 변화를 주기도 하는데 동굴이 주는 어두운 느낌은 낮고 둥글고 흰 담장을 보면 없어진다.

고대 중국의 아취 있는 롤러코스터라고 할까.


프랑스의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가 지은 성당이 연상되는데

흰 벽과 둥근 벽 지붕 때문인가 보다.





바닥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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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아래 바닥은 작은 조약돌이 촘촘하게 박혀있어 시각적으로 조형적 다채로움을 선사하고 동시에 비가 올 때 진흙에 발이 젖지 않도록 기능할 것 같다.


언덕에 오르면 지나왔던 누각들이 발아래에 보인다.



연못 옆 정자, 누각



푸른색 유리가 인상적인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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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으로 인해

현대적인 느낌과 고전적인 느낌, 서양적인 분위기와 동양적인 분위기가 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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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면 21세기 팬시상품에 나올법한 몽글몽글 다섯 잎 도안이 귀엽다.

귀엽기만 하게 내버려두지 않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더해 장중함을 잃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이렇게 큰 정원을 만든 재력가인데 가볍게 보일 수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육각형 누각으로 보이는데, 바닥에도 육각형 모자이크가 있다.


한편, 중국에서 선호되는 숫자 8. 팔각형 누각.

하늘을 찌를 듯한 처마 끝을 보니 자부심이 강한 누각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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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형태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유려한 곡선에 신경을 쓴다.


기이한 형상의 돌을 수집해서 구불구불 진입로를 만들었다.

어찌 보니 귀엽다.


아기 돌사자 조각, 문구 팬시상품에 쓰여도 괜찮을 법한 다섯 잎 모양 창 장식, 낮은 담장 등...

이 정원의 주인과 설계자의 취향엔 귀여움과 유머가 깃들어있다. 좋은걸. 평화롭고.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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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회유식 정원은 연못이나 호수를 정원의 주요 요소로 두고 누각과 식물을 배치하여 돌아다니면서 정원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데 졸정원은 그 정수를 보여준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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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을 물가에 두는 것은

물 표면 반사가 주는 다채로움 때문이라고 하는데 보니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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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랑은 아방가르드한 느낌마저 준다.

좌우 방향뿐만 아니라 높낮이를 조절해서 정원 산책 동선과 뷰에 다채로움을 추구하는데

이 회랑은 높낮이에 변화를 주어 재미있다.

기능적으로는 연못에 바짝 다가갈 수도 있겠다.

작은 배를 띄운 건지도...



우연히 마주친 꼬마


바로 이 부근에서


꼬마 친구를 하나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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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연 잎 하나를 우산처럼 쓰고 있던 아이.

내가 먼저 웃으며,


"니 하오" 하니


"니 하오" 한다.


귀여운 목소리.

중국어를 알면 몇 마디 더 해 볼 수 있으련만...


사진 찍어도 되냐고 손짓 발짓으로,

괜찮다고 끄덕끄덕, 미소도 지어준다.


세상 어디를 가도 이쁜 아이들.


루쉰 공원을 완성한 것은 상하이 시민.

한 권의 두툼한 텍스트인 졸정원을 완성한 것은 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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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정원은 자금성, 이화원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소여서인지

관리에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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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의 나라, 중국

의자도.


사람 키를 넘는 큰 도자기.

용이 도안되어 있다.


대륙 스케일, 대륙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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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적인 풍경.


대나무,

변화를 준 긴 회랑,

흰 벽에 투각 창,

자연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는.


쓸고 닦고 하기보다는

내버려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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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정원이라는 두툼한 책의 후반부에 도달했다.



졸정원이라는 책의 후반부



시야가 툭 터진 넓은 곳 여기저기에

넓은 졸정원을 둘러본 후 다리를 쉴 수 있도록 벤치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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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벤치도, 나무 터널도 꽃으로 장식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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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바구니를 나무 등걸에 매달아 두니 위쪽에서도 꽃을 볼 수 있어 공간 전체가 화사하게 느껴진다.

전날 우원에서 본 비슷한 형태의 하얀 꽃, 붉은색도 있음을 졸정원에서 본다.



세계 각지에 수많은 정원이 있고,

졸정원보다 더 넓은 정원도 있겠지만

이런 정도의 큰 규모의 정원을 이토록 다채롭게 서술해낸 곳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졸정원을 본 이후 내게 중국은,

정원으로 기억되었다.


일본이 다도 양식의 도코노마가 있는

료칸으로 기억되었듯이.





졸정원

졸정원 홈페이지

쑤저우 고전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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