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목적과 수단을 구분한다. 그리고 목적이 중심이자 주인공이 되고 수단은 주변적이 된다. 목적은 그 이룬 바의 정도가 결과로 나타난다.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는 방법과 도구가 중요하고 결과를 결정짓기도 한다.
커피를 마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커피가 생산되고 유통되고 누군가 커피 한 잔을 원하고, 선택하고, 주문해서 마침내 커피 한 잔이 만들어지는 긴 여정 모두가 과정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전까지 나는 여러 과정을 거친다. 원두를 구입하고, 도구를 장만하고, 방법을 익혀서, 만들어서, 나의 취향에 맞는 커피와 조우한다. 나의 개인적 과정을 둘러싼 수많은 과정의 넓고도 긴 스펙트럼이 있다. 아니, 그 대역폭의 과정의 끝자락의 무수한 점 가운데 하나가 나이다.
그 광대역의 풍부함 덕분에 많은 매력적인 도구들과 원두가 있고, 나의 커피 문화생활은 풍요롭다. 원두는 그 세계가 끝도 없고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내는 도구만도 정말 종류도 수도 많다. 여러 방식을 거쳐 지금 나는 집에서 대체로는 홀빈 원두를 사서, 갈아서, 필터에 걸러서 내려 먹는다. 드립 커피라고들 하던데, 이 방식이 나에게 가장 잘 맞았다.
드립 커피는 필터와 서버, 주전자 이들 도구와 나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분쇄하지 않은 원두(홀빈)는 갈아야 하므로 원두 분쇄기도 필요하다. 원두커피를 내려 마시는 일련의 과정은 제법 긴 여정이다. 먼저 쓰임이 생기는 도구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두분쇄기
나름 방앗간 역할을 해서인지 커피밀이라고도 불리는 것 같다. 전동 그라인더도 있고, 수동도 있는데 우리 집에서는 수동 방식을 사용 중이다. 나무에 틴 재질이라 물이 닿으면 안 되어서 처음에는 세척을 어떻게 하나 궁금하고 조금은 걱정이 되었는데 웬걸 유지가 가장 쉬운 녀석이었다. 그저 탈탈 털어서 갈린 원두를 비워내고 가끔 솔로 털어주는 정도로 사용하고 있으며 물로 씻어내지 않아도 되어 관리가 편한데다 내구성이 좋아 몇 년을 써도 그대로, 매우 흐뭇하다. 단순한 것이 오래간다.
드립용 물 주전자
커피는 물이 90도 정도 될 때 내리면 맛이 좋다고 한다. 온도에 따라 쓴맛과 신맛의 향배가 갈린다고도 들었다. 온도를 재지는 않고, 인덕션에 팔팔 끓은 물을 코가 가늘고 긴 드립용 작은 주전자에 옮겨 담으면 그 와중에 온도가 조금 내려가서 적당한 듯하다. 작년에 새로 구입해야 할 필요가 생겨서 재작년 유럽 오슬로에 갔던 인연으로 오슬로라는 상표의 단아한 드립 주전자를 구매해서 사용 중이다. 드립용 주전자도 없으니 빈자리가 많이 느껴졌는데, 일반 주전자로는 일정하게 가는 물줄기를 유지할 수 없어서 그 차이와 필요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서버
서버는 머그에 바로 내릴 때는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투명한 유리 재질의 서버가 있으면 내려오는 원두의 양과 색이 가늠이 되고, 커피를 잔에 따를 때 앞 코가 나와 있어 매우 유용하다. 유리 재질이라 파손되는 경우가 어쩌다 한 번씩 생긴다. 귀찮아서 큰 잔에 내려 따를라치면 대체로는 몇 방울 혹은 그 이상 바닥에 커피를 쏟게 되고야 만다. 역시 없어야 빈자리를 느끼는 법. 서버가 그랬다.
초기에는 검은색 플라스틱 뚜껑이 있고 플라스틱 손잡이도 달려 있는 유리 서버를 사서 사용했는데 그 서버가 파손된 이후 차 용도로 구입했던 뚜껑 없는 유리 서버를 겸용으로 사용하고 범용 실리콘 덮개를 구매해서 남은 커피를 잠깐 보관할 때 뚜껑으로 사용하고 있다.
드리퍼와 필터, 필터 홀더
드리퍼는 드립 원두커피의 꽃이라고 할까. 여러 요소들이 커피의 맛을 결정하지만 내리는 이 과정은 도자기를 빚는 과정처럼 공을 들여야 한다. 도자기를 빚을 때 손에 힘이 적당히 들어가야 하듯, 적당한 굵기로 간 원두를 드리퍼에 넣고 물 주전자의 물의 양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커피를 천천히 적셔주면 중력의 도움으로 커피가 내려진다. 그러고 보니 드리퍼 중에 도자기로 만든 것이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도자기 드리퍼 아래쪽에 구멍이 세 개 정도 나 있고, 그 안에 종이 필터를 끼운 후 원두를 넣어 사용한다. 종이 필터를 사용하면서 나무로 간단하게 만든 필터 홀더를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다.
플라스틱, 도자기, 천, 황동, 스텐 드리퍼
도자기 외에 융으로 만든 천 드리퍼도 있고, 황동이나 스텐, 플라스틱 드리퍼도 있다. 처음에는 플라스틱 투명 드리퍼+까만색 플라스틱 뚜껑과 손잡이의 유리 서버 세트 상품을 구입해서 사용했는데, 도자기와 종이 필터의 조합으로 사용하다가, 작년에 스테인리스에 황동 느낌의 도금을 한 영구 필터를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다. 레이저 기술을 이용하여 뚫은 미세한 구멍이 있어서 종이 필터를 덧대지 않아도 된다. 기술 발전이 새로운 도구를 가능하게 했다. 맛의 차이는 있다.
종이 필터로 내린 드리퍼는 커피 기름을 더 많이 걸러줘서 맛이 더 깔끔하고, 스텐 드리퍼는 훨씬 맛이 풍부하다. 전자는 마실 때마다 나무가 베어나가지만, 후자는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도자기는 유리화되어 재활용도 안 되고 굉장히 오래간다. 우리가 유물 도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도자기가 고온에서 만들어져 오래가기 때문. 스텐은 도자기 드리퍼 보다 조금 더 가격이 나가는 정도이다. 가격도 큰 부담이 없고, 탈 플라스틱에 더하여 커피 한 잔 마실 때마다 소비하는 종이 필터를 아낄 수 있어 자부심이 높아진다.
내리고 난 원두는 말려서 모아 자연 제습제로 사용 중이다. 여과 후 스텐 드리퍼에 들러붙어 있는 원두 가루는 전용 솔로 털어내고 뜨거운 끓는 물로 부셔 사용한다. 가끔 이 과정이 귀찮거나 새로 갓 사온 원두를 깔끔하게 마시고 싶을 때는 도자기 드리퍼+종이 필터 조합으로 내리기도 한다. 쓰던 도자기 드리퍼가 혹 깨지면 더는 구입하지 않을 것 같다.
원두 커피 드리퍼용 종이 필터를 모아봤다. 한 광주리 가득 넘치게 모였다.
이제 커피를 내려보자.
서버 위에 드리퍼를 올린다. 따뜻한 물을 조금 드리퍼에 흘려서 온도를 올려준 후에, 갈아 둔 원두를 넣는다. 주전자로 드리퍼와 서버를 워밍업 시키듯이, 원두에도 적당량 물을 부어 이번에는 원두를 잠에서 깨운다. 잠시 기다려서 원두가 물을 기분 좋게 품어서 잘 융합된 듯하면 본격적인 커피 내리기가 시작된다.
지금부터는 '향의 향연'.
향을 만끽하며 천천히 내린 커피. 물 붓고 멈추기를 몇 번 반복한다. 조금 일찍 마친다. 너무 알뜰하게 내리면 맛이 탁해진다. 조금 부족하다 싶을 때 그만하고 물을 조금 타서 농도를 조절해 마신다. 쓴맛 신맛 단맛이 어우러져 이번에는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 섬세하고 예민한.
결과가 좋을 때도 있고, 흡족하지 못할 때도 있다. 과정에서 이미 어느 정도 예상된다. 물론 빗나갈 때도 있지만. 고른 하얀 거품 대신, 어딘가 성글고 무지개색 큰 방울이 피어나거나 물을 부어도 원두가 묵묵부답이거나 할 때가 있다. 대체로 맛이 기대에 못 미친다. 맛있는 커피를 내리려면 도구 하나하나 잘 다루어 주고 과정 과정 주의를 기울여줘야 커피도 응하는 것 같다. 나는 커피 맛 자체보다 커피 향, 그리고 이들 도구들을 접하는 시간들이 더 좋을 때도 있다. 내가 다루든, 다른 사람들이 다루는 것을 지켜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