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 군고구마
외부 평가 대신 나다움을 선택하기까지
고민 많은 9년 차 마케터의 솔직한 회고.
여전히 일은 어렵고 매 순간 헷갈립니다.
정답은 없으니 그저 기록합니다.
고구마는 비교와 불안 속에서 자라나
나다움과 온기로 천천히 익어가는 중입니다.
오늘도 나답게 살고 싶은 당신에게 전합니다.
"그러니, 고구마 사세요"
대행사와 인하우스 중 어디가 더 나을까?
사실 어디를 가던 일이란 빡세고, 배울 게 많고, 사람을 소모시키기도, 단단하게도 만든다. 차이는 게임 룰에 있다.
일이란 결국 문제를 정의하고, 액션 아이템을 정의하고, 결과를 만들고, 다음을 설계하는 과정이다. 이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대행사와 인하우스는 그 과정에서 문제의 주인과 성과가 쌓이는 단위, 책임이 떨어지는 지점이 다르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같은 사람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장하거나 닳아버린다.
대행사는 기본적으로 외부의 문제를 다룬다.
클라이언트가 있고, 브리프가 있고, 전달해야 할 산출물이 있다. 시작 지점부터 목적이 비교적 명확하다. 결과물로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대게 ‘내일 오전까지’, ‘이번 주 안에’, ‘오늘 최종 확정’ 같은 기간 중심의 문장이 일상이다. 기획서, 제안서, 리포트, 크리에이티브 가이드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로 일이 남고, 그 결과물이 곧 평가가 되는 순간이 많다.
이 환경에서 실무자는 설득을 연습한다. 세운 논리로 이해가 다른 사람을 같은 결론으로 데려가고, 불명확한 요구를 문서로 고정하며, 의사결정이 빠르게 나올 수 있도록 프레이밍한다. 대행사 경험이 탄탄한 사람의 강점은 대체로 여기에 있다. 빠르게 구조를 만들고, 자료를 정리하고, 말과 글로 합의를 끌어내는 힘이 생긴다.
대행사의 장점은 압축 성장이다. 다양한 업종을 경험하며 케이스가 빠르게 쌓이고, 채널 운영 감각도 탄력이 붙는다. 완벽한 답이 없어도 일정과 목표에 맞춰 최선의 옵션을 내는 훈련이 반복된다. 단점도 있다. 합의된 사항이 자주 뒤집히고, 업무 스콥이 늘어나고, 누군가의 니즈가 기준을 흔들 때가 많다. 실무자는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과 다른 선택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자주 만난다. 성과의 ‘지속’보다 ‘전달’에 초점이 맞춰지기도 한다. 긴 시간 축의 임팩트를 체감하기가 쉽지 않다.
인하우스는 내부의 문제를 다룬다.
내가 만든 기획은 제품과 운영, 고객 경험과 연결되며, 결과가 서비스 안에 남는다. 여기서 성과는 캠페인 단위로 끝나기보다 고객 생애주기와 퍼널 전반에 누적된다. 그래서 인하우스는 속도보다 정합성을 자주 요구한다. 실행 전엔 조율이 필요하고, 실행 후에는 운영과 개선이 이어진다.
이해관계자가 많을수록 의사결정이 느려질 수 있고, 그 느림은 실무자에게 다른 종류의 압박을 준다. 대신 한 번 잘 만든 구조는 계속 돌아가며 성과를 만든다. 단순한 캠페인 성과를 넘어 시스템으로 남기는 경험이 쌓인다. 리텐션과 CRM, 실험 설계, 고객 세그먼트, 퍼널 최적화 같은 일들이 중심이 되는 이유다.
인하우스의 장점은 레버리지다. 개선이 누적되고, 고객을 장기적으로 보고, 기능과 메시지, 채널을 엮어 지속 가능한 성장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의사결정에도 더 깊게 참여할 수 있다. 단점은 조율 난이도다. 결과를 만들기 위해 설득해야 하는 대상은 대부분 내부 조직, 우리 팀원들이다. 우선순위가 수시로 바뀌고, 합의가 길어지며, 스스로 권한의 경계를 정해야 하는 순간이 자주 온다. 잘되면 회사의 성과지만, 안 되면 결국 우리 탓이다. 방패가 적은 만큼, 실무자의 부담이 깊어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건 나를 파악하는 일이다.
대행사에서 살아나는 사람은 대개 짧은 사이클과 높은 텐션 속에서 집중이 올라간다. 빠른 피드백 루프가 오히려 동력이 되고, 결과물을 내며 설득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반대로 인하우스에서 빛나는 사람은 긴 호흡의 문제를 좋아한다. 데이터로 학습하고, 반복 개선을 통해 성과를 누적시키며, 구조가 굴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을 느낀다.
스킬셋도 관점이 달라야 한다.
어디서든 필요한 기본기는 문제 정의, 우선순위 설정, 커뮤니케이션, 데이터 리터러시다. 대행사는 여기에 스토리라인과 문서화, 프레젠테이션, 클라이언트 매니지먼트를 요구한다. 한 장의 슬라이드로 논리를 정리하고, 한 번의 미팅에서 결론을 끌어내며, 요구사항을 정돈해 관리하는 능력이 레버리지로 작동한다.
인하우스는 실험과 운영, 리텐션, 제품 협업이 더 중요해진다. 가설을 만들고 검증하며, 반복해서 개선해 지속 성과를 만드는 힘이 필요하다. 개발과 디자인, CS, 세일즈와 함께 움직이는 만큼, 하나의 과제를 기능과 메시지, 채널로 분해하고 다시 합치는 역량이 커진다.
그래서 시니어 레벨에 들어서기 전까지 가능한 범위에서 다양한 경험을 권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단순한 이직 횟수나 환경을 넘어선 나를 해석할 데이터다. 다만 아래 두가지를 기준으로 너무 늦지 않게 자신을 해석했으면 한다.
첫째, 내가 잘하는 것을 '능력 -> 조건’으로 정의해본다.
: “나는 일을 잘해”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높은 퍼포먼스를 내”가 더 정확하다.
둘째, 내가 힘들어하는 지점을 ‘의지 부족 -> 시스템의 부재’로 바라본다.
: 대행사에서 힘든 이유는 마감과 변경이고, 인하우스에서 버거운 지점은 조율과 책임이다.
대행사와 인하우스를 군고구마로 비유하자면, 한쪽은 강한 불에서 빠르게 익히는 방식이고, 다른 한쪽은 은근한 열로 오래 익히는 방식이다. 어느 쪽이든 잘 익히려면 불을 탓하기보다 내가 어떤 익힘에 강한지 알아야 한다. 고민이 되는 상황이라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내 성향과 업무 스콥을 파악하고, 디벨롭 가능한 환경을 선택한 뒤, 그 안에서 성장하는 것.
어디에 있든 힘든 이유가 다를 뿐이고, 그 차이를 알면 덜 흔들린다. 그리고 내가 만든 습관과 기준이 단단하다면, 결국 나는 어느 자리에서도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
이 게임의 방향성과 룰은
결국 내가 정하는 것이니까
오늘의 데이터.
나는 어떤 고구마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