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시선, 아빠의 시간
중학교 시절, 아빠에게 암이 찾아왔다.
다행히 초기 발견으로 지금은 완치하셨지만,
그 과정에서 아빠가 느꼈을 외로움과 두려움을 난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난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 이제야 그때의 아빠가 보인다.
아빠와의 관계는 그리 가깝지 않았던 중학교 2학년 시절. 집안의 공기는 무겁고 조용했다. 두 분의 냉전이 길게 이어지던 어느 날, 엄마는 나와 오빠를 불렀다.
- 놀라지 말고 들어. 아빠가 병원에 다녀오셨는데, 좀 안 좋으시다.
- 왜요, 어떠신데요?
- 암 이래.
‘암.’
15살의 나에게 암은 곧 ‘죽음’에 가까운 단어였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병실에서 눈을 감는 장면만 떠올랐다. 고개를 돌려 아빠를 봤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셨지만, 그날따라 그의 어깨는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침묵 속에 태워지는 담배 연기처럼, 아무런 말씀이 없던 아빠.
병원에 따라간 날, 나는 의사 선생님께 울며 물었다.
“아빠… 수술받으시면 100% 완치되시는 거예요?”
“치료에 있어서 100%라는 말은 없어요. 하지만 다행히 초기라 수술하면 괜찮을 겁니다.”
‘괜찮다’는 말도 그때의 나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막연하고 불안한 감정이 마음을 짓눌렀다.
텅 빈 집과 아빠의 부재
아빠는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셨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엄마는 함께 서울로 올라가셨다. 그동안 고모가 집에 와 계셨지만 집안은 텅 빈 듯했다. 등굣길 가게를 지나며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해도, “잘 다녀와라” 하시던 아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학교에 다녔다. 수업 시간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친구들과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병실의 아빠는 어떤 모습일까. 수술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혹시나 잘못될까 두렵진않으실까. 그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아빠는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나는 알지 못했다. 아니,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렴풋한 기억 속엔 오빠에게 애어른 같은 말만 했던 것 같다. 그럴수록 우리가 꿋꿋하게 더 잘 버텨야 한다는 그런 말.
몇 주 후, 수술은 성공적이었다는 소식과 함께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셨다. 배에는 수술 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곧바로 가게로 나가셨다. 어린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모든 것이 괜찮은 줄 알았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15년 후, 나에게 찾아온 암
시간이 흘러 내가 30대가 되었을 때, 건강검진에서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갑상선에 종양이 발견됐습니다. 위치상 좋지 않아 보이니 수술을 서두르셔야 합니다.”
‘암.’
그 단어가 다시 나를 덮쳤다. 갑상선암이 생명에 큰 위협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두려웠다.
소식을 들은 아빠가 가장 먼저 서울로 올라오셨다. 당시, 수술 날짜를 받기 전 초진조차도 최소 1~2개월은 기다려야 했다. 혹시나 대면 방문을 하면 날짜를 앞당길 수 있을까 싶어, 아빠와 함께 여러 병원을 찾았다. 그중 한 곳이 15년 전 아빠가 수술을 받으셨던 세브란스 병원이었다.
환자 카드를 발급받으며,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고 싶었던 나는 말했다.
“아빠, 우리 병원도 선후배네요. 선배님!”
아빠와 빙그레 웃었지만, 사실 나의 마음은 무거웠다.
‘아빠는 그때 이 길을 혼자 걸으셨겠네.’
아빠의 시간, 그리고 나의 깨달음
15년 전, 아빠는 혼자 이 병원에 오가시며, 치료를 받으셨다. 조용히 감내하셨을 그 외로움과 두려움. 그때 그는 나와 오빠를 걱정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우리를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빠, 나는 아빠랑 같이 다니면서도 겁나고 불안한데. 아빠는 그 때 어떻게 하셨대. 혼자서 많이 외로우셨죠?”
내 말에 아빠는 담담히 웃으셨다. 그리곤 불안해하는 내게 말씀하셨다
“괜찮아. 잘 이겨낼 거야. 아빠도 그랬잖아.”
그 한마디는 무심한 듯했지만, 그 안엔 시간이 묻어 있었다. 그때의 아빠가 얼마나 강했는지, 얼마나 큰 무게를 감당하고 계셨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의 시간, 나의 깨달음
수술을 준비하며 나는 아빠의 시간을 떠올렸다. 혼자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 검사를 받던 발걸음, 수술대에 누워 두 눈을 감았던 순간, 치료를 받기 위해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고독함.
그때 나는 철없는 아이였고, 아빠의 시간을 알지 못했다.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 이불을 덮어주며 말없이 곁에 앉아 계시던 아빠. 그 묵묵한 온기는 그가 내게 주었던 사랑의 깊이를 말해주었다. 이제야 그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사랑
아빠가 걸어오신 시간은 나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그 사랑을 따라 더 나아가고 있다. 때론 뒤따르고, 앞장서며, 이제는 아빠 옆에서 의지할 수 있는 딸이 되고 싶다.
그때는 몰랐던 아빠의 무게를, 이제는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기를.
그런 딸이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딸아이인, 그녀는 지금 작은 나무가 되었고,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을까. 이제 마지막 이야기만이 남았다.
+추신.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했지만, 병원 한편에서 쪽잠을 자며 나를 지켜주신 부모님.
그분들의 마음은 내가 부모가 된다 해도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앞으로도 계속 부족할 테지만, 그럼에도 평생 두 분의 철부지 딸로 남고 싶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묵직하고 위대한,
나의 아빠, 나의 영웅.
존경하는 담윤님께 이 글을 바칩니다.
아빠라는 이름은 늘 무거웠습니다.
그 무게를 가늠하지 못했던 어린 날부터, 조금씩 그를 이해하게 된 지금까지.
위로만 느껴지던 아빠의 존재는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내 안에 스며들었습니다.
시장 한가운데 쌀가게에서 시작된 아빠의 삶.
딸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의 시간 속에서 발견한 사랑과 희생, 그를 통해 배운 것들.
그리고 전하고 싶은 아이의 고백.
이 이야기는 아빠와 나, 그 사이의 시간과 사랑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