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 치며, 그래도 나와 사람들을 믿자.
안타깝게도 사람끼리도 약육강식이 벌어진다. 후천적인 약육강식으로는 갑질이 있겠고, 선천적인 약육강식으로는 물리적인 힘에 의한 추행 같은 게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보통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남성 상사와 여성 부하 간의 약육강식은 후천적인 면과 선천적인 약육강식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경험한 약자들은 '숨거나',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 용기를 가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약자에겐 용기를 선택할 여유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용기를 가진 약자들이 나온다.
그들이 싸우는 방법은 1:1 싸움에서 벗어나고, 조직:1 싸움에서 벗어나는 길일 것이다. 결국 '사회'에 연대를 호소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는 약자에 연대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이유를 설명하자면 그것이 사회를 존속시키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발생하는 후천적인 약육강식 중 하나가, 약탈자에 대한 사회적 응징이 있다. 이때, 약탈자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가 된다. 사회적으로 약탈자는 배제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약자가 지목한 '약탈 혐의자(강자가 아닌 약탈 혐의자)'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할 때'이다. 약탈자 입장에서는 매우 당연한 수순 일 수 있다. 정당한 약자(고발자)에게는 매우 부당한 일이지만.
여튼 이때, 우리는 후천적인 약육강식 중 '약탈자에 대한 사회적 응징'을 위해서 '약탈 혐의자'가 '약탈자' 임을 확인해야 한다. 그 기일이 얼마가 걸리던지, 제삼자 이자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우리는 '약탈 혐의자'의 '약탈 행위'를 확인 해 '약탈자'로 만들고 나서야 사회적인 응징을 할 수 있다. 사회가 휘두르는 응징도 결국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약탈자'라고 하더라도 폭력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만, '약탈자'라는 것이 '폭력을 휘두를 필요성'이란 근거가 될 뿐이다. 이 근거로 사회와 제삼자인 나는 '약탈자를 약탈하는 최후의 약탈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여튼 우리는 이 약탈의 과정, 약육강식의 과정에서 우리의 존엄성,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을 거라는 믿음, 다른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들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고소인과, 피고소인을 모두 사람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그 힘든 과정을 거쳐서, 결국 우리는 언젠가 '약육강식'을 실행하게 된다. 우리는 언젠가 '최후의 약탈자'가 된다. 우리는 언젠가 폭력을 휘두르게 된다. 이런 약탈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들에 대한 믿음, 자신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그 믿음 만이 우리를 약육강식의 수레바퀴에서 살아나게 해줄 것이다. 약육강식의 사슬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이 빌어먹을 고통스럽고 슬픈 세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다.
요즘은 기분이 참 꿀꿀하다. 발버둥 치며, 그래도 나와 사람들을 믿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