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 음악 산업의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저녁은 커먼즈 펍에 가는 시간. 4월의 마지막 날도 커먼즈 펍과 함께 했다. 4월 커먼즈 펍은 “음악 산업과 창작자”시간이었다. 윤종수 변호사님이 말하길, 이번 커먼즈 펍은 징수 규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마련된 시간이라고 했다. 오늘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은 래퍼 MC 메타(가리온)과 래퍼 출신 업계 종사자 이신 신권웅 씨였다. 저번 달 커먼즈 펍은 정보를 확장하고 소개하는 대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 리뷰는 한 편의 감상문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이번 커먼즈 펍은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늘려주는 계기가 될 것 같다. 2014년도 즈음 일하던 곳에서 음악 하시는 분을 만났다. 그리고, 그분의 공연에 가고 동료들도 만났다. 그 뒤 내 일부를 차지한 질문 중 하나가 ‘음악 산업 종사자들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였다. 이번 커먼즈 펍은 이런 질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인터넷 서비스를 하나 기획하고 싶기도 하다. 오늘 이 시간은, 그 서비스를 기획하고자 하는 마음의 연료가 될 것 같다.
징수 규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징수규정 역사에 대해 훑어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상황은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불충분하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적폐가 점점 청산되고 있는 것처럼, 음악계의 적폐도 점점 청산되고 있었다. 징수 규정의 개정을 통해서 조금씩이라도 음악가에게 가는 비중이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만 ‘기획사’를 견제하는 ‘실연자 단체’가 별도로 있다는 것은 좀 안타까웠다. 우리나라의 기획사는 음악가, 가수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었고 이들 기획사를 견제하기 위한 단체가 생겼다고 한다. 그냥 기획사가 잘 챙겨주는 게 기획사 측면에서 보아도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지는 모르겠다. - 아, 물론 이 부분도 전체적으로 개선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
음악가에게 시장이란 편협하고 불평등하며 이기적이다. 또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은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아티스트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로 벌어 들이는 돈은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한다. 뭐, 다른 수익도 그렇게 크지 않다고 한다. 결국 ‘생활’을 위해서는 아르바이트를 뛰어야 한다. 음악을 하기 위해 ‘알바’를 해야 한다. 그렇게 생활은 고달파진다.
가리온의 MC 메타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힙합 전사가 되고 싶었지만 하하하하”
이번에 이야기를 나누면서, 음악 시장에 대한 이야기, 음악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음악가는 농부다. 어떻게 하면 좋은 쌀을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는 농부. 그런데 이걸 경제적 관점, 사업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이렇게 변질된다. 어떻게 싸게 만들어서 비싸게 팔 방법만 찾는 사람이 된다. 따라서 음악가는 자신의 ‘쌀’이 가치 있게 팔리기를 원한다. 수익보다는 ‘가치’다. 음악가를 설득하고자 한다면, 거기서 시작해야 한다. (커먼즈 펍 대화 중)
“아티스트를 설득하려면, 작품이 얼마나 가치 있게 소비되는지를 중심으로 설득하라”
음악 시장에 있는 음악가들의 목소리를 정리하면 이런 것 같다. 그러니까, 존재감이 적다는 것이다. 음악가라는 정체성이 주는 존재감, 자신이 음악을 만들었다는 성취감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이런 나쁜 환경에서 자기가 존재한다고 느낄 수 조차 없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다른 걸 포기하고, 내가 하고 싶은데로 음악 하기.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들은 수익보다 ‘가치’라고 했다. 나 역시 정말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비즈니스 디자인에 대해 공부하고 뭔가 해보겠다고 하면서 항상 하는 생각이 하나 있다.
사업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사업은 가치를 창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돈은 가치를 창출하면서 창출되는 기름(혈액)이다.
위와 같은 생각은 음악가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 나는 ‘돈만 보는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장사꾼’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절대 기업가가 될 수 없다. 음악가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왜 그럴까?
나는 CD를 사지 않았다. 나는 CD가 주는 다른 무언가를 산 것이지 음반을 산 것이 아니다. 나는 장나라를 좋아하려는 내 욕구를 충족시켜줄 무언가를 산 것이다. 나는 장나라 씨 팬이다. 나는 장나라 음반을 사서 장나라의 팬이라는 정체성, 존재감을 확장하고 강화해 내 욕구를 충족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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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음악은 어떤 가치로 ‘평가’ 되고 있는가. 우리가 음악을 소비하면서 부여하는 가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이참에 뮤지션 친구에게 시장에 대해서 물었다. 지금은 뮤지컬을 하고 있는 친구다. 그렇게 밝고 긍정적인 답변은 오지 않았다. 짧게 나눈 이야기였지만 친구의 말 중 머리에 꼳힌게 있다.
“소비성 음악”
그는 그렇게 표현했다. 지금 주류 음악은 소비성 음악이라고,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는 시장은 아니라고 말이다. (또한 그는, 내가 ‘말초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나, ‘말초적’이라는 단어가 적확한 표현은 아니라고 했다. 따라서, 말초적이라는 단어와 소비성이라는 단어의 이미지 차이를 기억하면 그의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음악가는 지금의 플랫폼은 신뢰하지 않지만, 대중을 믿고 있다.
예를 들어서 만약 플랫폼이 음원을 무작위로 화면에 나열해준다면, 대중은 ‘소비성’ 음악을 찾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오늘 만난 음악가들은 정말 뭔가 순박해 보였다. 좀 과장하면 철이 안 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믿고 있었고 음악을 믿고 있었다. 그들에게 사람과 음악은 그런 존재다.
우리는 음악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을까? 아니, 우리는 음악을 소비하고 얼마나 감사해하며, 적당한 보답을 하고 있을까?
기본적으로는 단순한 배경음악으로 취급해도 좋고, 소비성 음악으로 여겨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합당한 적절한 보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음악가와 우리 대중 사이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 것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오늘은 이 질문을 끝으로 글을 줄인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음악가, 사업가, 대중, 소비자.... 는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