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글빵 숙제 (도강생의 뒤늦은 나머지 공부)
퇴근길, 노을이 긴 그림자를 드리운 정류장 의자에 앉아 버스들이 정차하거나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럴 때면 문득, 나는 삶이라는 이름의 도로를 따라 어딘가로 향하는 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멈춰 있어도, 어딘가에서는 움직임이 이어진다.
버스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창밖의 도로는 끊임없이 바뀌고, 나와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도 언제든 승차와 하차를 반복하며 바뀌어 간다. 어떤 이는 무거운 짐들을 들고 타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하차한 후 다른 버스를 기다리기도 한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하늘은 때로는 한 점의 구름 없이 투명하고, 때로는 인쇄잉크처럼 짙게 물든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나는 그 아래에서 나의 이동을 가늠해 본다. 수많은 변화와 반복되는 흐름 속에서 여러번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언제부터 이 노선 위에 올라탔으며, 어디까지 가볼 생각인가.
처음의 출발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1985년 겨울, 울음이라는 엔진 소리와 함께 지도 없는 운행이 시작되었고, 그 위로 가족이 먼저 동승했다. 어른들의 결정은 내가 바라보게 될 풍경의 범위를 정해놓았다. 나는 알 수 없는 경로에 몸을 실은 채 하나의 좌석을 배정받았고, 부모의 품에 안긴 채 도로 위를 달려야 했다. 내 의지로 출발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전진해야 한다는 압력은 내 안에서 계속 엇갈리며 첫 지도를 그려나갔다.
무언가를 인식하기 시작하며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비교였다. 모두가 자기 이름에 진로와 목표를 덧붙여 소개했고, 누군가는 이미 도착한 듯이 장래를 말하곤 했다. 한 편의 책처럼 들리는 장래희망, 절차대로 쌓아 올리는 스펙, 순서가 정해진듯한 체크리스트. 나는 그들의 등을, 발자국을 따라가 보려 했지만 결국 그 흐름에 닿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엇나가버린 박자 속에서 "나는 특별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일치하지 못했다. 길을 잃은 미아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그렇게 점점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왜곡을 더해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딛는 도로 위는 날카로운 유리밭 같았다. 내게 허용된 좌석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곳에 앉아있는 이유를 말하기는 어려웠다.
학교와 사회라는 이름의 정류장은 일정한 간격으로 찾아왔다. 출발 신호가 울리면 모두가 동시에 승차하고, 도착 신호가 울리면 한꺼번에 하차했다. 같은 노선을 여러 날 달리다 보면 옆자리에 앉은 얼굴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다. 친근감이 생겨나기도 하고, 뜬금없이 다투거나 멀어지기도 했다.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면, 누군가의 하차가 내 생각의 방향까지 흔드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교과서의 페이지를 넘기듯 하루가 넘어가도, 내 마음 한편에 남은 미완의 과제는 사라지질 않았다. 나는 왜 이 자리에 있고, 무엇을 향해 달리는지 설명할 말이 없었다. 남에게 들려줄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 곧 자신에 대한 무지와 자존감의 상실처럼 느껴졌다.
그즈음 누군가에게 듣게 된 한마디의 말은 수많은 날들을 지새온 지금까지도 새겨져 있을 만큼 커다란 파문을 가져왔다. 거창한 가르침도 아니었고, 화려한 언변으로 중무장한 구호도 아니었다.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표시된 노선을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지나온 궤적을 읽어가며 방향을 새로 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출발을 내 의지대로 정하지는 못했어도 그 이후의 새로운 궤도를 그리는 일은 오롯이 내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 같다. 도로의 굴곡과 요철을 원망하는 것으로는 길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 엔진은 끊임없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바퀴는 이미 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 필요한 건 운전석을 향해 한 발자국씩 이동하려는 마음. 어쩌면 아직은 서툴지만 내 의지를 개입시키려는 첫 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심만으로는 버티는 것도, 실행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마음에 메아리처럼 맴도는 감정들을 어디에도 두지 못한 채 지나치면, 몸은 달리면서도 방향은 계속 흐려졌다. 그때 나는 무심결에 노트 하나를 꺼내 들었다. 완성된 문장을 쓰려던 것도 아니었고, 유창한 어휘력을 뽐내려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하루의 표정을 담아두는 것이면 충분했다. 퇴근길 차내 특유의 냄새, 비에 젖은 도로의 반짝임, 좌석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손바닥에 눌린 펜 자국 같은 사소한 것들.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들을 모아 한 줄씩 적다 보니, 그 사소한 것들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이름 붙이지 않았다면 그저 아무런 이유 또한 찾지 못한 채 사라졌을 그것들이 내 하루를 조금은 다른 질감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그렇게 내 삶의 버스는 이유의 파편들을 찾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동안에는 내 안에서 만들어내던 소음이 자취를 감추었다. 타인의 속도에 맞춰 가쁘게 따라붙으려 애썼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비로소 시선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내 안의 감정에 어떠한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지 그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화가 나도 분노한 이유를 몰랐고, 웃음이 나도 기쁜 이유를 몰랐다. 왜 불안했는지, 무엇이 서운했는지, 대화에서 어떠한 부분 때문에 내 마음에 긁힘이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전문가의 분석이 아닌, 내 안에 생겨난 모든 조각들을 쌓아두는 기록, 단순히 떠오르는 단어들을 나란히 하나의 종이 위에 올려두기만 해도 마음의 무게 중심이 바뀌었다. 그 변화는 단번에 겉으로 드러나는 표식들을 건네주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나의 표정과 선택에 영향을 주었다. 기록한 단어 하나가 나의 선택을 바꾸고, 바뀐 선택이 나의 표정을 바꾸었다. 그것은 조금씩 다른 궤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누적은 내 이동을 훨씬 인간적인 속도로 되돌리기에 이르렀다.
길을 바꾸는 것은 커다란 표지판도, 지도도, 이정표도 아니었다. 거창한 부속품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말을 듣고 그것을 그대로 행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를 한 칸씩 옮기다 보면 1mm씩, 1cm씩 변해가는 생겨났다. 쌓인 기록들은 내 속도를 정하는 도구가 되었다. 남의 기대를 맞추느라 과열되었던 엔진을 조금 식히고, 반대로 너무 늘어난 벨트를 조절해 주는 장치. 그것은 치료라기보다는 정비에 가까웠다. 파손된 부분을 덮거나 새로운 부품으로 바꾸는 대신, 어디가 부패되어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방식으로 나를 조율하며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일에 가까웠다.
책과 노트북 화면을 덮고 정류장으로 다시 걸어 나왔을 때의 세상은 여전했다. 버스는 출발과 도착을 반복하고, 사람들은 뛰거나 멈추었다. 변한 건 외부가 아니라 나의 시선이었다. 예전의 나는 차창 밖 풍경을 구경하는 승객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장면들 속에 있는 나의 위치와 속도를 살핀다. 나는 왜 여기에 서있고, 다음에 어떤 차를 타야 하는가.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노선에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 답은 항상 완벽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질문을 던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질문은 나를 앞으로 기울게 만든다. 그 기울기가 새로운 이동과 목적지를 만든다.
미리 정해져 있는 지도를 따라 이동했더라면 인생이 조금은 쉬웠을까. 유혹은 분명히 존재했다. 표시된 경로를 따라가면 길을 잃을 염려가 적고, 요철이나 방해물 또한 적을 것이며, 검증된 휴게소와 환승 지점이 보장될 것이다. 그러나 그 경로는 나만의 보폭과 호흡에 상관없는 속도를 강요할 수도 있다. 내게 맞지 않은 좌석을 강제로 배정하고, 내가 보고 싶은 풍경과 무관한 창밖을 턱 밑까지 들이밀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안전함 대신 온전한 나의 속도를 택하고 싶어졌다. 불안이 아예 사라지지 않더라도, 나로 인해 정해지는 이동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반복했다. 단어의 선택이 어설프더라도, 맞춤법과 문법이 헝클어지더라도, 하루의 끝에 나의 솔직한 마음을 적었다. 그러다 보니 기록은 습관을 넘어 일종의 주유 행위가 되었다. 마음이 바닥을 드러낼 때마다 공책이 연료통 역할을 했다. 대단한 성과로 채울 수는 없었지만 다음 정류장까지 이동하는 최소한의 힘은 늘 확보할 수 있었다. 경로를 잃고 헤맬 때 그것은 나에게 이정표가 되어 주었다.
"그때의 너는 이곳에서 잠시 길을 멈추었구나. 그렇다면 이제는 이쪽 길로 가볼까"
정류장 의자로 돌아와 다시 하늘을 본다. 붉은빛의 노을은 어느새 사그라들고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한다. 버스가 들어오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예전 같으면 아무 생각도 의심도 없이 발부터 올렸겠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적어둔 기록을 떠올리며 새로운 선택을 할 것이다. 오늘의 피로, 오늘의 서운함, 오늘의 기쁨들이 합쳐져 내일을 위한 선택을 만든다. 조바심으로 밀어붙인 과속이 아니라, 나의 속도로 도로를 읽는 법. 그렇게 선택한 보폭으로 차를 선택한다.
창밖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연이 흐른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구경꾼이 아니다. 관찰과 방관을 넘어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 해석을 넘어 체험을 해보는 사람. 기록이 연료라면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그 연료를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를 아는 기술이다.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에서 속도를 내고, 언제 다른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할지. 그렇게 나는 다음의 칸으로 몸을 옮긴다. 이 여정의 이름을 되뇌며, 내 안의 지도를 업데이트한다.
업데이트된 지도 안에서 나는 "해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노선을 그리게 되었다. 내 안의 엉킨 감정과 소음들을 풀어내며, 동시에 누군가에게 미묘한 온기를 건네고 싶다는 마음으로 비롯된 단어 "해이." 이 이름은 나의 새 노선을 연결하는 환승센터가 되었다. 이름을 가진 자는 방향을 말할 수 있고, 방향을 말할 수 있는 자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목적지를 말하는 대신에 "이 길은 나에게 맞다."라고 말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환승의 시작이었다.
종착역을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곳을 알 수 없어서 라기보다는 그것을 미리 정해두면 이 여정의 유연함을 놓치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창밖의 풍경은 하루에도 여러 번을 바뀌며, 내 안의 지도 또한 여전히 업데이트 중이다. 때로는 속도를 늦춰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잠시 정차하여 다시 연료를 채워야 할 때가 있다.
어쩌면 내 인생의 버스는 여전히 여러 환승을 남겨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또 다른 주유소에 멈춰 설 수도 있고, 지금까지는 보지 못한 커다란 요철 앞에서 급정거를 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경로를 이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짙은 안개에 가려져 1m 앞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갇혀 있지는 않다. 지금 나는 나의 글로 다시 출발하는 법을 알고 있고, 환승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방향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종착역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끝이 불명확하다는 뜻이 아니라, 여전히 가능한 경로가 남아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바라는 것이 생겼다. 언젠가 나처럼 누군가가 정류장에 앉아 삶이라는 버스를 바라보며 주저하고 있다면, 내 글이 그 사람에게 잠시라도 고민할 시간을 허락해 주는 등받이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누군가의 목적지를 대신 정해줄 수는 없다. 내가 누군가의 길을 함께 가줄 수도 없다. 다마 그가 자신의 속도로 길을 고를 수 있을 만큼,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을 공간 정도는 내 글 안에서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이란 것은 결국 도착지를 대신 말해주는 것이 아닌, 이동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양갈래의 방향지시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이제 내 인생 1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출발은 내가 정하지는 못했어도, 이제는 내 이동을 설명할 언어와 방법이 생겼다. 정류장마다 흔들렸던 감정들이 기록을 통해 방향을 얻었고, 그 방향은 내게 다음 선택을 요구한다. 나는 이제 내릴 준비를 한다. 다른 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서, 그리고 더 넓은 도로로 진입하기 위해서다. 거기서 나는 또다시 흔들리고, 또다시 적을 것이고, 그러는 과정 속에서 한 번 더 나의 속도를 찾게 될 것이다.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길 위에 서있지만, 나는 또 한 줄의 글을 적으며 출발을 준비한다.
종착지가 아닌, 다음 선택지를 향해.